미국 조지아주에서 미 이민 당국에 붙잡혔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12일 오후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의 급습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일주일 만에 수습됐지만, 미국 내 한국인 근로자들의 비자 문제와 정부의 대미 투자 이행 방식 등을 놓고 한·미 당국 간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금·협상·귀국까지 급박했던 7일
지난 4일 조지아주 서배너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에 ICE 무장 요원들이 들이닥쳐 한국인 317명(총 475명)을 체포하자 한국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는 물론 대통령실의 안보실·정책실·비서실이 총력 대응에 들어갔다. 외교부는 장·차관이 동시에 워싱턴DC와 애틀란타로 날아가 석방 교섭과 영사 조력을 진행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 2기 행정부와 관세 협상(7월 30일 타결), 한·미 정상회담(8월 25일)으로 거액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한국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에 강력한 항의"(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 "국민들의 충격"(조현 외교부 장관 10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접견) 등 공개적으로 강한 용어를 쓰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도 9일 국무회의를 통해 이번 사건을 "부당한 침해"라고 언급했다.

한국 측의 강력한 항의로 큰 틀의 석방 교섭은 지난 7일 타결됐지만, 미 측이 구금자들의 귀국길 '수갑 이동'을 고수하며 당초 예정했던 귀국 일정(10일)보다 하루가 더 걸렸다. 구금자들은 11일(현지시간) 새벽 포크스턴 구금 시설을 나올 수 있었다. 현지에 남기를 희망한 한국 1명에 대해선 영사 조력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외교부는 설명했다.
이날 공항에서 귀국하는 근로자들을 맞이한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미국과의 업무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새로운 시작"이라며 "새로운 비자를 만드는 방안을 포함해 미국 체류 자격 시스템 개선을 향후 적극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귀국한 316명 가운데 임신부도 1명 있었다고 강 비서실장은 설명했다.
비자 문제 불씨로

자칫 양국 간 외교 현안으로 비화할 수 있었던 이번 일은 미국이 한 발 물러선 모양새로 봉합됐다.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외교부에 따르면 미국 내 신설·증설 한국 사업장은 2000개가 넘는다. 이번처럼 대규모 구금은 아니더라도 적법한 비자 소지 여부를 문제 삼아 언제든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체포 사례가 또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11일 미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일을 설명하며 "관광 비자 말고 적합한 비자를 받아야 한다"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들어 오는 옛날 방식대로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노동자를 데려오려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규칙을 어기는 일은 이제 끝났다"고도 했다.
문제는 미국이 주장하는 '합법 비자'는 발급 요건이 까다롭고 물량(쿼터)도 제한적이라는 게 정부와 업계의 설명이다.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 다수는 단기 상용 비자(B-1)를 소지했음에도 구금 대상이 됐다. 이에 외교부는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정부가 기존에 추진해 왔던 한국인 전문인력 전용 취업비자(E-4) 신설을 앞당긴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비자 문제는 출입국 정책을 총괄하는 미 국토안보부(DHS) 등 미 부처 간 협의도 거쳐야 해 장기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이와 관련, 박윤주 외교부 1차관은 이날 인천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나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빠른 건 법령 해석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가 한국 기업·근로자와 미 이민 당국 간 B-1 비자에 대한 해석 차이로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본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미국 측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자국민을 최대한 고용하라는 데 있다. 현실적으로 숙련 노동자 수급이나 납기 문제 등을 고려할 때 한국 기업들에겐 어려운 요구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 나온다. 업종과 사업자 규모에 따라 필요한 숙련 노동자의 범주·규모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민낯 드러낸 대미 투자 합의
이번 사태는 관세 협상과 정상회담을 거쳐 한·미가 큰 틀에서 합의한 '마스가(MASGA) 프로젝트'등 대미 투자 3500억 달러(펀드 조성)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란 지적도 있다. 이에 수반되는 한국인 근로자들의 체류 자격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투자 이행에도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당초 대미 투자 방식·시기 등은 회색 지대로 남겨 재량권을 최대한 확보한다는 구상이었는데, 지금 상태에선 한국인 근로자들의 신변을 볼모로 불리한 이행 각서에 서명해야 하는 구도가 될 여지마저 있다. 러트닉 상무부 장관은 한국인 구금자들이 출국한 당일인 11일 미 CNBC 인터뷰에서 "한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왔을 때 무역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면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일본이 서명한 문서를 보면 유연성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은 (투자)합의를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거나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러트닉이 언급한 미·일 전략적 투자 양해 각서에 따르면 일본은 트럼프 임기 내인 2029년 1월 19일까지 55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미국이 요구하면 현금성 달러 자산을 45영업일 내에 입금해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다. 미국산 쌀 구매량을 75% 늘리고 액화천연가스 등 연간 총 7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런 식의 '투자 세부 내역'을 한국에도 요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