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부채와 황씨 부인

2025-01-13

얼마 전 중국 산동성에 다녀왔다. 산동성은 한반도와 가까워 옛날부터 교류가 많았다. 자연재해와 가렴주구를 피해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도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다. 산동성에 갈 때마다 삼국지의 주인공인 제갈량(諸葛亮, 181~234)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 이유는 아마 그가 산동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갈량의 이름은 량(亮)인데, 그를 높여 부르는 공명(孔明)과 그의 닉네임 와룡(臥龍)도 그의 총명함과 카리스마를 풍긴다. 공명은 ‘공자처럼 똑똑하다’는 경칭이고, 와룡은 누워있는 용이 아닌가. 하긴 제갈량은 공자의 산동성 700년 후배이기도 하다.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중국인들도 제갈량의 총명함 만큼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정 절제 부인 조언 받아들여

냉정하게 천시·지리·인심 파악

적벽대전 승리는 예견된 결과

삼국지의 클라이맥스 ‘적벽대전(赤壁大戰)’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적벽대전 때 제갈량은 강에 떠 있는 배에 불을 붙여서 그 불길이 동남풍을 타고 북쪽의 적에게 휘몰아치게 하는 화공(火攻)법을 택했다.

영화를 보면 적벽대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 제갈량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학의 털로 만든 부채인 학우선(鶴羽扇)을 부치며 독백 조로 말한다.

“지도자는 지천시(知天時), 즉 하늘이 주는 시간을 알아야 하고, 사지리(査地利), 즉 땅이 주는 이익을 찾아내야 하고, 효인심(曉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를 요즘 식으로 바꾸면 천시(天時)는 국제정세를, 지리(地利)는 지정학을, 인심(人心)은 여론을 의미한다.

제갈량의 군대는 적과 강을 사이에 두고 피가 마르는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 동남풍으로 불길을 일으켜 강 건너 적을 공격해야 하는데 북서풍만 부는 통에 모두가 초조해하고 극도로 불안해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량은 학우선을 부치며 작은 목소리로 ‘동남풍(東南風)’을 주문했다. 그의 주문이 점점 크게 들릴 무렵 ‘갑자기(甲子起)’ 동남풍이 불었다. 그러자 제갈량의 군대는 계획대로 강 위의 배들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강 건너 적에게 옮겨붙었다. 적벽대전은 동남풍 덕에 제갈량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삼국지 벽화 거리에 가면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볼 수 있다.

제갈량을 흠모한 후세 사람들은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학우선으로 도력을 발휘해 동남풍을 불러왔다고 믿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제갈량의 승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천문학 덕분이었다. 그는 적벽대전이 벌어질 날이 천기가 바뀌는 갑자일(甲子日)임을 알고 있었다.

그 후 삼국지를 읽고 제갈량의 매력에 흠뻑 빠진 한반도사람들은 적벽대전에 나오는 ‘갑자기’라는 말을 일상에 쓰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갑자기’라는 말 대신 ‘돌연(突然)’이라는 말을 쓴다.

알고 보면 제갈량의 애장품인 학우선은 그의 부인 황씨가 남편의 안위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학우선을 건넨 이유를 보면 그녀가 제갈량 못지않은 지모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제갈량이 황씨 처녀와 혼사를 치르게 된다. 혼사를 치른 후 신부의 얼굴을 본 제갈량은 충격을 받는다. 그의 눈에 비친 신부가 너무 박색이라 그는 파혼까지 생각한다. 밤에 조용히 나가려고 문을 찾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집 마당을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제갈량은 이른 아침 마당에 나온 장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할 수 없이 신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황씨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학우선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조금 전 대화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어요. 당신이 유비를 이야기할 때는 표정이 밝았어요. 그런데, 조조를 말할 때는 찌푸리더군요. 큰일을 하려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학우선으로 얼굴을 가려보세요.”

그녀의 비범함에 반해버린 제갈량은 그 후 학우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천지인(天地人)이 늘 변하듯 제갈량에게 주어진 상황도 시시각각 변했다. 책사였던 그는 훗날 촉한(蜀漢)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행정을 경험한 터라 진정한 리더십은 적절한 위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적을 지킵니다. 사내는 밭을 갈고, 계집종은 밥을 합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습니다.”

제갈량이 현장 업무까지 챙기려고 사소한 장부까지 들여다보자 아랫사람이 한 말이었다. 실무자들을 긴장시킬 요량으로 한 장부 검사였지만 그는 이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제갈량은 책사로서 주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뇌하고, 일의 집행 정도를 고심하는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죽는 날까지 학우선을 부치며 독서와 사색을 했다. 학우선이 그의 머리를 차갑게 해주어서 그랬는지 그의 판단은 늘 정확했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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