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392년에 건국했지만 새 수도로 한양이 결정된 것은 1394년이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이듬해인 1395년이니 어떻게 그렇게 빨리 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한양 건설의 기획자 정도전은 북쪽에 북악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남산, 동쪽에 타락산(낙산)의 산세에 의지해 18㎞의 도성을 건립했다.
백성이 드나드는 4대문과 도성의 중심에는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뜻하는 건축물을 세웠다. 동쪽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이고, 북쪽은 홍지문(弘智門, 숙정문으로 변경)이다. 한양의 중심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었다. 오늘날 제야의 타종식을 하는 곳이다.
도성 안 중요한 시설인 경복궁·종묘·사직은 ‘주례’의 ‘고공기’에 나오는 궁궐 건축 이념에 맞추었다. 경복궁은 백악산 기슭에 터를 잡고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남북축 선상에 광화문·흥례문·근정문과 주요 전각들을 배치했기에 중국의 궁궐처럼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를, 우측에는 토지의 신(국사신·國社神)과 곡식의 신(국직신·國稷神)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직단(社稷檀)을 두었다. 아울러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을 궁궐 앞에 배치했으며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변(지금의 종로)에 설치했다. 한양은 유교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정도전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유교적 이념을 겸비해 건설됐다.
한양의 도시계획과 주요 전각 배치를 한 정도전은 건물을 어떤 개념으로 설계하느냐에 대해 ‘조선경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궁원(宮苑)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잃는다. 너무 누추하면 조정의 존엄을 보일 수 없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미(美)다(宮苑之制, 侈則必至勞民傷財, 陋則無以示尊嚴於朝廷也, 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으로, 백제 온조왕의 궁궐 건축에 대해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미학이라 할 수 있겠다. 2025년에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이규혁 건축가·한옥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