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TV토론에서 했던 이 말이 문득 떠올랐다. 무려 23년전에 들었던 이 말이 다시 머리에 떠오르는 건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는 연말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말이 떠오를 만큼 지난 한 해 우리 사회가 유독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계엄 딛고 이재명 정부 출범 반년
여당은 민주주의 위협 정책 강행
야당은 시대착오적 과거에 매몰
공존·화해의 약속은 어디로 갔나
작년 12월 3일의 충격적인 계엄 선포 이후 우리 사회는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분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계엄이 희생자 없이 조기에 해제되고 탄핵이 인용되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파면되었고, 뒤이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반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혼란을 겪고 난 후에 얻은 정치 질서의 회복이었기 때문에 새 대통령이 이런 불안정과 분열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국민의 큰 기대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우리를 갈라 놓은 혐오와 대결 위에 공존과 화해, 연대의 다리를 놓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국민 행복 시대를 활짝 열어 젖힐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 후 6개월이 흘렀고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평가해 볼 때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딱히 세상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야당이 여당이 되었다고 해서 정치가 제 모습을 찾은 것도 아니고, 여야 간 극단적인 대결의 정치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대통령이 이전 대통령과 달리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서 “공존과 화해, 연대의 다리를” 놓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혐오와 대결”의 정치 속에 살고 있다.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이 대통령 역시 이전과 다르지 않게 분열의 정점에 놓여 있다.
오히려 새로운 갈등만 더해졌다. 집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여당은 ‘갈등 제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논란이 큰 정책을 내세우고 밀어붙였다. 국제회의마다 민주주의 회복을 자랑해 온 이재명 정부가 정작 국내에서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를 압박하고, 내란전담재판부나 법왜곡죄 같은 그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담은 언론중재법 개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모습들이다. 이런 무모하고 비합리적인 법안의 추진은 정파의 문제를 떠나 이재명 정부가 진정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이뤄줄 것으로 기대했던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게 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존과 화해’를 말했다. 서로 다른 의견과 이념의 공존은 민주주의 체제의 기반이 되는 핵심 원칙이고, 이를 위해서는 경쟁적인 정치세력 간 대화와 타협은 필수적이다. 이 대통령은 ‘공존과 화해’를 말했지만, 여당은 그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야당과는 ‘악수조차’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당의 이런 행동은 ‘공존과 화해’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지난 6개월 동안 보여준 민주당의 실력을 보면 권력을 잡는 데는 능한지 모르겠지만 나라를 끌고 가는 정치적 역량은 변변치 않은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통합은 유능함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입니다. 국민 삶을 바꿀 실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세력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편 가르고 혐오를 심는 것입니다.” 야당일 때는 남의 이야기처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통치 세력이 되었다면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여기에서의 표현대로 “실력도 의지도 없이 권력 유지를 위해 편 가르고 혐오를 심는” 또 다른 정치세력일 뿐이다.
아마도 집권세력이 이렇게 상대편 눈치 보지 않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건 무능한 야당 때문일 것이다.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권력을 중도에 잃었는데도 국민의힘에서는 그걸 아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제대로 된 반성이나 당 혁신의 주장도 제기되지 않는다. 죽은 정당 같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천하의 전두환’보다도 더 나쁜 평가를 받은 윤석열의 그림자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사실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시대적 역할을 다했기에 이제는 사라져야 할 정치세력인 듯하다.
이처럼 ‘행복 시대’를 약속한 대통령은 그런 노력을 안 하고, 그나마 남은 대안 세력은 시대착오적 과거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공존, 화해, 연대, 꿈, 희망, 행복”과 같은 단어는 머리에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행복하지도 않고 살림살이가 나아지지도 않은 한 해였다. 올해는 그렇다고 해도 내년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수 있을까. 이리저리 둘러봐도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아 허망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연말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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