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는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리허설 도중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몇 분을 모시고 실물의 ‘E플랫종(鐘)’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키가 50㎝쯤 되는 E플랫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연주에 꼭 필요한 타악기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흔하게 쓰는 악기는 아니어서 서울시향(SPO)에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대규모 합창단이 나오는 대작 연주를 앞두고 타악기 파트에서 그 악기를 사달라는 요청이 와서 고민하고 있는데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 실물을 보여주는 현장 이벤트에 초대한 바로 그분들이다.
특수악기 개인기부 성금으로 매입
예술 발전 위해 기부문화 꼭 필요
국공립예술기관들도 후원회 발족
기부자 증가로 재원 조성 활성화
특수 악기이다 보니 인터넷으로 세계 곳곳을 수소문해 어렵사리 원하던 E플랫종을 구했다. 1000만원이 넘는 구매비용은 그분들이 댔다. 덕분에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은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 지휘로 필요한 모든 악기를 갖추고 실연은 물론 녹음까지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녹음한 말러 교향곡은 클래식 전용 애플리케이션인 ‘애플 뮤직 클래시컬’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현장에서 진심으로 예술을 좋아하며 즐기는 열혈 팬을 ‘찐팬’이라고 한다. 그 ‘진짜 팬’ 중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에 대한 순정한 애정을 넘어 필요할 때마다 예술단체와 예술가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바로 개인기부자다. 서울시향에는 이번에 급히 E플랫종을 구해준 개인기부자 모임 ‘SPO 메체나티’ 외에 여러 기부 모임이 있다. 기업인 출신 개인기부자로 구성된 ‘SPO페이트론스’도 이미 오래전부터 튜바 등 악기를 구매해 주거나 연습실 의자를 고쳐주고, 해외 순회공연 비용을 지원하는 등 해마다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 매회 공연마다 수십 장의 공연티켓을 사주는 찐팬 애호가도 있다. 이처럼 목적을 정해서 하는 다양한 기부활동을 ‘지정기부’라고 한다.
이러한 지정기부를 포함해 다양한 후원 및 협찬은 재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문화예술에는 큰 활력소다. 그걸 알면서도 오랫동안 예술단체나 예술가 등 ‘필요한 쪽’과 개인기부자와 기업 등 ‘도움을 주려는 쪽’ 모두 소극적이었다. 코로나19 여파도 있지만, 그 이전에 그릇되게 형성된 각종 후원에 대한 왜곡된 사회 정서도 문제였다. 그사이 문화예술계의 공공보조금에 대해 높아진 의존도는 스스로 자생(自生)하려는 의지를 약화하고 활력을 잃게 했다. 상대가 그리 원하지 않는데 굳이 도움을 주려는 독지가는 드물다.
다행히 최근 국공립 예술기관을 중심으로 ‘자세 전환’의 조짐이 보여 고무적이다. 재원 조성 방식의 기본인 후원회 같은 통상적 기구조차 없었던 보수적인 국립단체에서 후원회 발족 소식이 들렸다. 지난해 말 창단 74년 만에 처음으로 후원회를 조직한 국립극단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분을 후원회장으로 모셨다. 후원회 기금을 모아 창작극 개발과 해외 교류 사업 등에 지원하겠다니 기대가 크다.
국공립 공공기관에서 개인기부는 물론 후원과 협찬을 활성화하는 데에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제도화’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 기관과 단체에 대한 여러 경영평가 지표 중 하나로 ‘재원 조성의 달성도’를 두어 펀드레이징, 즉 재원 조성을 독려하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공립 기관 평가 시행 초기에 중요한 지표로 삼았다 한동안 사라진 그 지표가 다시 살아나 시행 중이라고 한다. 공공재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나라마다 문화예술 지원 방식은 천차만별이라 단순 비교에는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예술단체 재원 중 개인기부가 25% 정도를 차지한다. 60%에 이르는 자체수입 다음으로 비중이 높다. 반면 우리나라는 80% 정도를 공공지원에 의존한다. 개인기부는 많이 쳐서 3% 정도다. 예술에도 시장주의가 작동하는 미국의 지원제도와 우리 사정은 전제 자체가 다르긴 하나, 개인기부 천국 미국의 사례가 부럽긴 하다.
그동안 문화예술 후원과 협찬의 큰 축이었던 국내 기업들도 점차 지정기부로 지원 방식을 바꾸고 있다. 여기에 애호가를 넘어 진실한 애정으로 예술단체를 위해 선뜻 기부를 아끼지 않은 개인기부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걸 보면, 여러모로 문화예술 재원 조성의 앞날은 밝다. 푸른 뱀의 해,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는 개인기부자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낸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