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스틸 히어 (I am still here)
억압 속 5자녀 지킨 어머니 용기
군사독재 시대 견뎌낸 가족 서사
다큐 리얼과 영화의 미학 조화
모녀가 한 인물 중년·노년 연기
감독 브라질 민중의 현실 담아
오스카 국제 부문 후보작 올라
독재는 영화의 영원한 소재다. 독재 하의 탄압과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은 그 자체가 드라마다.
어머니의 강한 모성과 용기는 종종 기적을 낳는다. 영화 ‘아이 엠 스틸 히어’는 남편이 독재 정권의 정보기관에 끌려가고 연락이 두절된 채 돌아 오지 않는 가운데 5자녀와 가정을 지켜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이며 나라의 군사독재 시대를 견뎌낸 한 가족의 서사다.
199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중앙역’,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의 영화로 찬사를 받은 감독 바우테르 살리즈 감독은 불과 세 번째 영화로 세계적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그의 영화들은 브라질의 현실과 민중의 암울한 삶에 민감하다. 다큐의 리얼함과 극영화의 미학이 조화를 이루는 살리즈의 카메라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브라질 민중의 현실을 담아낸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앙역 앞에서 문맹들의 편지를 대필하는 일을 하는 괴팍한 노처녀 도라(페르난다 몬테네그로)와 교통사고로 졸지에 엄마를 잃은 소년 조슈에의 험난한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 ‘중앙역’에서 도라를 연기한 몬테네그로는 그해 베를린 영화제 은공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브라질의 국민 배우 95세의 몬테니그로는 ‘아이 엠 스틸 히어’에서 그녀의 딸 페르난다 토레즈가 연기하는 저항의 여성 유니스의 말년을 연기하기 위해 잠시 등장한다. 토레스는 브라질 배우로는 최초로 2025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오는 3월 열리는 오스카 여우주연상 부문에도 후보로 올라있다.
어머니가 수상하지 못한 오스카상을 27년 만에 딸이 수상하게 될지는, 올해 오스카 시상식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아이 엠 스틸 히어’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있다.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1985년까지 브라질은 21년간 군사 독재하에 있었다. 강제 연행에 이은 고문, 실종, 살인 등의 잔혹한 인권 탄압은 그 나라 국민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이 시기에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많이 발표됐다. 영화는 브라질 국민들의 집단 트라우마를 그릇에 담아 민중의 정서를 치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살리즈 감독은 이 분야의 선두주자다.
1971년 일어났던 실제 사건에 바탕한 ‘아이 엠 스틸 히어’는 서사 속 서사의 형태로 진행된다. 국회의원 루벤스 파이바가 정보기관에 의해 연행되고 살해되기까지의 일들을, 그의 아들이며 추후 작가가 된 마르셀로 파이바가 회고록에 담아 정리한 이야기들이 이 영화의 모티브다.
작가는 놀랍도록 삶에 낙관적인 어머니와 브라질 공동체를 동시에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의 가족들과 브라질 국민이 인내했던 고통과 어두웠던 과거를 공동체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어머니의 초상화로 정제했다.
1970년대 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바닷가 근처의 저택에 사는 파이바 가정. 가장 루벤스 파이바(셀튼 멜론)와 그의 아내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 그리고 다섯 아이가 동네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나라가 잔혹한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화는 곧 군인들이 대마초를 피다 걸린 10대 소년들을 검문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테러리스트 명단과 닮은 얼굴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독재정권의 통제가 극에 달하던 시기임을 짐작게 한다.
어느 날, 군사 독재정권이 들어선 후 1년간 피신해 있던 루벤스가 자녀들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만에 정보기관에 의해 끌려간다. 전직 의원 자격으로 증언해야 한다는 이유이지만 좌익 노동운동가 루벤스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유니스는 남편이 사라진 후 홀로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의무감으로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
군사 독재 정부는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유니스는 남편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남편을 찾아 헤맨다. 남편의 서명 없이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어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헬리콥터가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며 시민들을 관찰한다. 언제나 낯선 사람들이 집 주위를 맴돌고 건너편에 주차한 차 안에서 요원들이 집안을 끊임없이 지켜 보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납치된 좌익 인사들에 대한 뉴스가 들여온다. 그런데도 유니스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녀의 겸손한 결의에 사람들은 감화되고 세상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유니스는 어린 자녀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숨긴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 브라질이 처한 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큰 아이들은 무언가 세상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어느 날 유니스마저 머리에 가방을 씌운 채 어디론가 끌려간다. 감금실은 피로 젖어 있고 변호사의 접견조차 거부된 채 12일 동안 격리된다. 그녀는 요원으로부터 사진들 속 사람들을 반란군으로 지목하도록 강요받는다. 딸이 다니는 학교의 여교사가 눈에 뜨인다. 주변의 비명이 벽을 뚫고 들어와 유니스의 영혼을 흔들어댄다.
마침내 1985년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유니스는 48세에 법대에 입학해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처럼 실종된 사람들을 정부가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운동가로 활동한다.
말미에 다다른 영화는 시작 부분의 평온함으로 다시 돌아가 있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했고 손자들이 할머니 주변을 뛰놀고 있다. 이즈음에 가족사진을 분류하는 작업은 이 가정이 경험했던 억압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마지막 장면. 세월이 흘러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 노년의 유니스(페르난다 몬테네그로)와 만난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한다. 남편 루벤스의 사진이 TV에 등장한다. 아나운서가 그를 저항의 영웅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니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흥미진진하고 조용히 감동을 주는 영화이지만 비애의 우물이 깊다. 중요한 건, 유니스와 브라질 국민이 수십 년의 어두운 역사를 견뎌냈다는 사실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ckkim2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