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는 짧고 화친은 길었던 애증의 500년

2025-09-11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한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먼 나라란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은 잘 못 되었다. 그런 뜻이라면 ‘가깝지만 먼 이웃’이라고 해야 옳다. 굳이 ‘가깝고도’라고 한 것은 거리만이 아니라 무언가 가까운 구석이 더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오랜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어디 나쁜 일만 있었겠는가. 마침 2025년은 을사늑약 120주년,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로,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기나긴 한일 관계사에서 고려와 일본 사이는 어땠을까?

신라·발해·조선보다 왕래 적어

고려는 바깥세상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비교적 활발하게 교류한 나라다. 하지만 교류의 방향이 서쪽으로 중국에 치우쳤고 동쪽의 일본과는 소원했다. 앞선 삼국 및 통일신라·발해보다, 그리고 뒤의 조선과 비교해서도 일본과 왕래가 적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일본에 있었다. 고려 전기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794~1185) 중·후기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 일본은 내향적인 분위기 속에서 국풍(國風) 문화를 발전시키며 대외 교류를 축소하고 있었다. 고려 역시 그런 일본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교류할 동인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두 나라 사람의 왕래마저 끊어졌던 것은 아니다. 『고려사』에는 999년(목종 2년) 10월 일본인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戶)가 내투(來投)했으므로 이천군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1호당 4~5명으로 치면 일본인 80~100명이 한꺼번에 내투, 즉 귀화해 왔다는 뜻이다. 그들이 왜 고국을 버리고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가 일본 사람 누군가에게 도피처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온 사람이 있으면 간 사람도 있을 텐데, 과연 1051년 7월 고려에서 일본 쓰시마에 사신을 보내 죄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압송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고려에서 도망쳐서 거기서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범죄자뿐 아니라 식량난 등 여러 이유로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일은 옛날부터 흔했다.

여진이 납치한 일 259명 극적 구출

은혜 베푼 고려와 교역, 각자 이득

몽골 압박에 일본 침략 돕자 반감

고려 공포시하며 교류 완전 단절

고려 내륙까지 왜구 침범하자

일본·왜구 구분해 외교 해법 모색

또 바다에서 표류할 경우, 본국으로 송환해주는 것이 당시에도 국제적인 관례였다. 고려와 일본도 서로 그렇게 했고, 이 경우 표류한 사람들에게는 상대국이 생명을 구해준 고마운 나라였을 것이다. 일본이 그 고마움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1019년 여진 해적에게 잡혀 끌려가던 일본 사람들을 고려군이 구출해서 본국으로 송환했던 것이다. 이해 3월 두만강 부근에 근거지를 둔 여진족이 배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서 일본의 이키·쓰시마와 규슈를 침략했는데, 이것이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도이(刀伊)의 입구(入寇)’라고 부르며 헤이안 시대 최대의 대외적 위기라고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전 말고는 외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이 거의 없는 일본 역사에서 사실상 최초의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끌려가던 일본인들을 고려군이 구출하는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4월 말 원산 앞바다에서 고려 수군이 돌아가는 여진 해적을 공격해서 배 8척을 포획하고 일본인 포로 259명을 구출해 일본으로 송환했다. 그때 구출된 여성의 생생한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던 중 고려 병선 수백 척이 나타나 도적을 물리치고 저희를 구조했습니다. 김해부로 향하는 길에 역마다 은으로 된 식기로 음식을 제공받았으며, 처우는 최상급이었습니다. 고려 관리는 일본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쇼유키(小右記)』) 1019년 4월 말이면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은 지 불과 3개월 뒤이다. 온 힘을 다해 거란과 사투를 벌인 직후였지만 전함 수백 척을 동원해서 여진 해적과 싸우고, 일본인 포로를 구출했던 것이다.

문종, 의사 요청했으나 거부당해

포로 송환으로 신뢰가 쌓여서인지, 그 뒤로 일본 상인들이 고려를 찾았다. 자개, 말 안장, 칼과 활, 수은 등 특산물을 가지고 왔고, 고려에서는 청자나 불화·불상 같은 고가의 문화용품을 구해갔을 것이다. 마침 고려의 전성 시기였던 문종대(1057~1082)의 일이다. 고려는 이들을 상대로 경제적 손익을 따지기보다 국가의 위상을 과시하는 데 활용했다. 일본 상인을 팔관회에 참석하게 해서 송·여진·탐라국 상인들과 함께 해동천자인 고려 황제에게 조공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려와 일본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익을 챙겼다. 그러던 중 고려가 일본에 도움을 청할 일이 생겼다. 문종이 평소 풍질(風疾), 즉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는데, 병이 낫질 않자 송과 일본에 의사를 요청했다. 일본과는 공식 루트가 없었으므로 상인 오소쿠테이(王則貞)가 귀국하는 길에 문서를 들려 보냈다. “귀국에 풍질을 잘 고치는 의원이 있다고 들었으니 보내 주기 바라며, 치료에 효과가 있으면 가볍지 않게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문서를 받은 일본 조정이 한동안 시끄러웠다. 처음에는 의사를 보내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만약 보냈다가 병을 고치지 못하면 어쩌냐는 신중론이 일어나더니, 그럼 무슨 핑계로 보내지 않을까를 의논한 끝에 고려의 문서가 외교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기로 하고 답서를 보내왔다. 이 결말을 두고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의 외교 자세를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지만, 고려와 적극적으로 교류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고려 후기에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고(1170년) 일본에는 막부가 들어서면서(1192년)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에서 모두 무신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그 뒤로 국내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양국 간의 교류는 점점 뜸해졌다. 그러다가 양국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있었던 몽골의 일본 침략이었다. 당시 고려는 전함을 만들고 2만 명 가까운 병사를 동원해서 몽골의 침략 전쟁을 도왔다.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지만, 일본의 반감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태업이란 있을 수 없는 법. 고려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분전했고, 그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는 몽골을 가리키는 ‘무쿠리’와 더불어 고려를 가리키는 ‘고쿠리’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두 나라의 교류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리고 70년 뒤, 이번에는 고려 사람들이 일본을 적대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왜구의 출현이었다.

일본 규슈와 쓰시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재난 등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면 왜구로 돌변해서 한반도를 침략하는 일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왜구는 간간이 출현했지만, 1350년을 고비로 그 양상이 갑자기 변했다. 일본에서 남북조 내전이 치열해지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가 이완된 결과였다. 왜구의 규모가 커졌고, 침략 횟수도 빈번해졌으며, 침략 지역도 해안을 벗어나 내륙 깊숙이까지 확대되었다. 그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막심했고,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협을 받아 천도가 논의될 정도였다. 고려에서는 최영·이성계 같은 명장들이 나서서 왜구를 격퇴했지만, 그와 더불어 외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행위에 대해 항의했고, 일본 조정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 “서쪽 해안의 사나운 백성들이 나가서 노략질을 하는 것이지, 우리 소행이 아닙니다. 규슈를 회복하면 해적을 단속할 것을 하늘에 맹세합니다”라는, 이례적으로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일본은 왜구에게 잡혀간 사람들을 송환하고, 고려에 군대를 파견해서 직접 왜구와 전투를 벌이는 성의도 보였다. 결국 1392년 일본에서 남북조 내전이 종식되자 왜구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당시 고려가 일본과 왜구를 구분해서 대응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까운 이웃 되려면 과거사 정리해야

고려와 일본 사이에는 500년 동안 애증이 교차되었다.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다. 때로는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각자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시간이 더 길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어떤가? 가깝지만 먼 이웃이 되지 않으려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존재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사람이 과거를 잊지 못하듯이, 역사를 묻어버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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