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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또는 협박’을 입증할 수 없는 수많은 강간 피해자는 그간 무수한 ‘무혐의’와 ‘무죄’ 앞에서 좌절해왔다. 명백한 성폭행인데도 “왜 더 극렬히 저항하지 않았나” “사실 동조한 것은 아닌가” 같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강간 피해를 신고했지만 경찰·검찰·법원에서 가해자가 무혐의 처분 또는 무죄 선고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3명을 지난해 12월16일 만났다.
피해자들은 각각 경찰·검찰·법원 단계에서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한경자씨(70대·가명)는 남편에게 강간당한 후 경찰에 신고했으나 불송치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유는 “피해자 진술에 의하더라도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강지우씨(20대·가명)는 친구와 함께 간 술집에서 만난 남성에게 강간을 당했다. 강씨 사건 피의자는 검찰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최하린씨(20대·가명)는 데이트 앱에서 만난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최씨가 “하지마” “싫어”라고 외쳤지만 가해자는 목을 조르고 몸을 짓눌렀다. 가해자는 3년 만에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행 강간죄 성립 요건인 ‘가해자의 폭행·협박’ 여부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한씨는 가해자인 남편에게 50여년 동안 가정폭력을 당했다. 저항은 더 큰 폭행과 폭언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몸에 새길 수밖에 없는 50여년이었다. 당시 한씨는 고령인 가해자가 발기되지 않자 “비아그라를 먹고 제대로 하자”며 기지를 발휘했다. 이어 “(가해자의) 숙소로 가자”고 거짓말을 해 가해자를 내보낸 다음 안에서 문을 잠가 상황을 일단 벗어났다. 한씨는 “당시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며 “강간 행위가 명백히 있었는데 폭행이 없었다는 이유로 죄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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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수 없었던 피해자 상태도 현행 강간죄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현행법에서는 사실상 피해자가 극렬하게 저항한 흔적이 없다면 강간죄 성립이 어렵다. 강씨는 피해 당시 의식이 없어 뒤늦게 피해 사실을 인지했다. 강씨는 “만취한 상태라 기억도 없고, 제대로 동의했을 리도 없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가 된 것이 황당하다”고 했다. 심지어 가해자는 의식을 잃은 강씨의 상태를 악용하려는 증거도 남기려 했다. 강씨는 “신고 전에 가해자에게 연락했는데 그때부터 증거를 만들려고 했는지 ‘동의하고 한 것이니 사후피임약 값은 주겠다’고 답장이 왔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 극도의 긴장·공포로 일시적으로 몸이 굳어 꼼짝하지 못하는 ‘긴장성 부동화’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씨와 최씨 역시 강간 당시 긴장성 부동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강간당하는 상황에서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당시 온몸이 떨리고 강직됐다”고 말했다. 한씨도 “50여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갑자기 강간을 시도하려는 모습을 보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같은 피해자의 상황을 현행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동의하지 않으면 강간’이 인정되지 않는 법 체계에서 수사기관은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피해자가 얼마나 사력을 다해 방어했는지를 묻는다. 세 사람 모두 수사 과정 전반에서 책임과 처신을 추궁당하는 경험을 했다. 최씨는 법정에서 신문 당시 “당시 몇 킬로(㎏)였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어 가해자 측 변호인은 “가해자가 이렇게 왜소한데 최씨를 강간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가해자 측 변호인은 “최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비키니를 입은 사진이 올라와 있는 걸 보면 문란한 성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씨는 “사건과 전혀 관련없는 내용인데도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았다. 재판정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한씨도 경찰 수사 과정에서 “남편 키가 몇이냐” “체중이 나가는 편인데 왜 제압을 하지 못했나” 등의 질문을 받았다. 강씨는 “수사 과정에서 노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무슨 술게임을 했는지 등을 물어봤는데, 결국 너도 가해자와 어울린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성폭행이 남긴 상처와 지난한 수사 과정은 피해자들의 일상을 집어삼켰다. 최씨가 가해자에 대한 재심 결과를 받아들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그동안 최씨는 “법을 믿어도 될까, 앞으로는 법을 따르면서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다. 강씨는 “우울하고 죽고 싶은 감정이 1년여간 계속됐다”고 말했다. 한씨는 “가만히 자다가도 너무 분해서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내가 그때 죽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고 했다.
이들이 비동의강간죄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같았다. 명백한 강간 피해를 ‘강간죄’로 정의하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하기 위해서다. 경찰의 ‘증거불충분’ 통보를 받아든 한씨는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죽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지금은 신고한 피해자가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나도 의식·의사 표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강간 피해가 발생했는데, 저항해야만 강간이 성립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최씨는 “만취 상태 등 의사 표현이 어려울 때 한 혼인도, 계약도 모두 무효라고 알고 있다”며 “의사 표현을 못하는 상황에서는 성관계를 동의했다고 간주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들은 비동의강간죄 도입으로 더는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렵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강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간 피해자는 신고를 하든 안 하든 힘들어요. 하지만 피해자 혼자 삭이려 하면 더 억울하고 힘들겠죠. 최소한 가해자들이 잘못했다는 걸 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