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 드리운 식민사관 2: 실제 승려 신미는 세종과 어떤 관계였나

2024-10-08

천재 승려 신미?

출처 - 영화<나랏말싸미>

승려 신미와 사멸한 몽골제국의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연계한 모방-공동 창제설을 주장한 이는 고려대 명예교수인 정광이다. 그의 가설은 몇 해 전 ‘나랏말싸미’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화가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지만 정작 승려 신미와 파스파 문자를 연계한 정광의 모방-공동 창제설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허술한 논증인지를 밝히며 비판한 경우는 드물었다. 정광의 가설이 여전히 불교계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것도 그의 이론이 가진 허구성을 제대로 짚어가며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광 교수가 밀고 있는 인물인 신미는 세종 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영화는 그가 혜성같이 나타나 초성만 있던 허술한 문자 훈민정음을 잘 정비하고, 난관에 부딪힌 모음 문제도 해결해 훈민정음을 완벽한 글자체계로 만든 것으로 그린다. 이 내용은 정광 교수가 주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처럼 신미가 세종대왕을 뛰어넘는 언어와 문자의 천재였을까?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길래 이런 주장을 할까?

신미는 기록에 따르면 원래 유학자였다. 본명은 김수성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했지만, 세속에는 관심이 없어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을 기술한 행장이 없어 그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다른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해야 하는데 그런 사료도 거의 없다. 남아 있는 사료의 어느 귀퉁이에도 신미와 훈민정음의 관련성을 증언하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얼마 안 되는 기록 중에 신미의 친동생 김수온이 쓴 ‘식우집’이 있다. 총 24권 중 권 2와 권 4, 두 권만 남았고 권 2에 세종대왕과 신미가 만났다는 아주 짧은 기록이 있다. 2줄이 채 안 되는 너무 짧은 기록이고 훈민정음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세종대왕과 신미가 만난 시기도 특정할 수 없다.

‘처음 세종대왕께서 신미의 이름을 듣고 자신이 머물던 산에 그를 불러 조용히 만나셨다. 신미는 빠르게 분별해서 말했고, 말하는 뜻과 이치가 정밀했고 넓었다. 대답하며 아뢰는 것이 세종대왕의 뜻과 맞았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께서 신미를 총애하고 만나는 날이 잦아졌다.

初世宗大王聞尊者名. 自山召至. 賜坐從容. 談辨迅利. 義理精暢. 奏對稱旨. 自是. 寵遇日隆.

-식우집 권 2 기류 봉천사기

출처 - 영화<나랏말싸미>

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종대왕과 신미가 만났다는 사실 밖에 없다. 동생 김수온이 세종대왕과 신미의 만남에 동석했다면 목격담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된 내용을 보면 그가 동석했던 것 같지도 않다. 식우집이 출간 연도를 감안하면 이 기록은 오래전에 들었던 세종대왕과 신미가 만난 소식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기억을 더듬어 쓴 내용으로 보인다.

김수온도 집현전 학사 출신이라 자기 형인 신미가 훈민정음 공동 창제자였다면 이를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형인 신미와 자기 집안을 치켜세우기 위해 세종대왕과 신미의 첫 만남 기사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내용도 남겼을 만한데 훈민정음에 대해선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미라는 이름이 총 68번 등장하는데 활동 시기의 세종에서 성종까지의 실록에 집중 등장한다.1 안타깝지만 신미에 대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와 훈민정음이 관련된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신미와 훈민정음을 직접적으로 엮을 사료가 없어도2 정광 교수나 모방-공동 창제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종이 내린 승직을 들어 신미를 훈민정음의 공동 창제자라 주장한다.

문종은 신미에게 ‘선교종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密傳正法悲智雙運祐國利世圓融無礙慧覺尊者)’라는 무려 26자에 이르는 길고 긴 이름의 승직을 내린다. 조선 왕실이 공이 있는 이들에게 내리는 시호나 직함의 길이는 정확히 업적과 직함의 중요도에 비례했다. 조정 대신들의 입장에서 승려에게 엄청나게 긴 관직3 을 내린 것도 못마땅한데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표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종대왕의 유지라 해도 조정 대신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문종의 승직 하사를 반대했다. 문종도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왕과 신하들의 팽팽한 줄다리기 덕분에 신미는 문종실록에 이름을 26번이나 올리게 된다. 문종 재위 기간이 2년 남짓했던 것을 고려하면 승려의 이름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결국 우국이세라는 문구를 빼는 것으로 문종과 관료들은 타협했다.4 문종과 신하가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훈민정음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신미가 훈민정음과 관계가 있었다면 승직 반대 기사에 한번은 훈민정음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미와 관련해서 훈민정음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신미가 훈민정음과는 상관없는 다른 공로로 승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승려 신미는 과거시험을 통과해 집현전 관리로 등용되었다는 것을 보아 세종대왕께서 호감을 느낄 만큼 총명하고 학문적 자질도 갖춘 사람은 분명한 것 같다. 세조를 도와 불경 번역에 참여했으니, 한자나 인도 범자도 익혔을 것이다.5 하지만 세종대왕께서 신미를 총애하고 승직까지 내리려 하셨던 것은 승려 신미의 뛰어난 학문적 자질 때문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이유, 소헌왕후의 죽음 때문으로 보인다.

소헌왕후의 죽음 이후, 갑작스러운 신미의 등장

출처 - 영화<나랏말싸미>

세종실록에서 신미는 소헌왕후가 승하한 직후, 세종 28년 5월 27일 자 기사에 느닷없이 등장한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어머니를 기리며 만든 불경을 왕실 불당 대자암에 봉헌하는 날, 신미가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1년 뒤 세종 29년 6월 6일 기사에 신미가 또다시 뜬금없이 등장한다. 앞뒤 맥락도 없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신미를 매우 믿었고 신미를 만날 때면 상석에 앉히고 무릎을 꿇어 절하며 예절을 다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수온이 식우집에서 세종대왕과 신미의 첫 만남 기사를 ‘처음 세종대왕께서 신미의 이름을 듣고(初世宗大王聞尊者名)’라고 시작한 것은 아마 세종대왕께서 소헌왕후와 두 아들을 통해 신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실록의 간략한 두 개의 기사와 식우집의 짧은 기사를 통해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소헌왕후가 생전에 신미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고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어머니를 통해 사제의 예를 갖출 만큼 신미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세종실록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불쑥 신미가 등장하고 일 년이 지난 시점에 느닷없이 대군들과 신미의 돈독한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전제를 할 때나 납득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공무와 관련되어 일거수 일투족까지 모두 기록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에 신미는 소헌왕후 승하한 후에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대왕과 승려 신미는 소헌왕후가 승하하기 전까지 공적이건 사적이건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이 암행을 하며 신미를 만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은 전혀 없다.

소헌왕후가 승하하기 전까지 세종대왕께서는 억불정책을 고수하며 불교계와 확실히 거리를 두셨다. 세종실록에는 세종대왕께서 신하들이 불교에 대해 위선적 입장을 가진 것에 불같이 화를 내시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도 소헌왕후 승하 전에 세종대왕께서 신미나 불교계 인사와 사적 교류를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세종대왕께서 말년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소헌왕후의 승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평소 소헌왕후에게 늘 미안하고 빚진 마음을 갖고 계셨던 세종대왕께서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큰 상실감에 빠졌을 것이다. 다행히 평소 소헌왕후와 가깝게 교유했던 신미가 있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신미와 대화하며 소헌왕후를 회상하고 상실감을 치유하셨을 것이다. 소헌왕후를 위한 불사를 신미에게 맡긴 것도 생전 소헌왕후와 돈독했던 신미의 관계가 주효했을 것이다. 세종대왕 말년에 추진되었던 불경 번역 사업도 불교가 백성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사회적 환경, 훈민정음 보급이라는 목적과 함께 왕후를 위한 종교적 발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출처 - 영화<나랏말싸미>

세종대왕의 성품을 고려하면 신미는 조선왕조실록의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세종대왕이 흡족해하셨던, 훌륭한 인품과 학식의 소유자로 보인다. 말년에 건강 문제로 고생하셨던 세종대왕께서 신미를 더 가까이 두셨고 결국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셨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회심 과정은 소헌왕후로 인해 생긴 신미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왕후가 없는 말년에 세종대왕께서는 신미를 말벗 삼으시며 크게 의지하시며 심신의 안정을 찾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문종이 선대의 유지라며 그의 직책명에 썼던 ‘우국이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신권이 강했던 조선이라지만 왕이 곧 조선이었고 만백성의 어버이였다. 왕의 안위가 조선의 안위, 만백성의 안위였다. 문종에게 아버지 세종대왕의 심신에 안위를 찾아 준 신미에게 ‘우국이세’라는 직책명을 내리는 것은 전혀 과한 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신미가 거듭 언급되었던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 말년의 심신 안정을 찾도록 도운 공로 때문이다. 그 덕분에 신미는 성종 때까지 왕실의 후대를 받았다.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는 역사적 전거가 없다는 점은 신미를 결정적 공동 창제자로 추앙하려는 모방-공동창제론자를 무척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소헌왕후 승하하기 오래전에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이 신미를 세종대왕께 소개했다고 우기기도 한다.

이들이 소헌왕후 대신 효령대군을 고른 것은 세종대왕과 신미와의 만남의 매개자를 소헌왕후로 상정하면 시점상 신미를 훈민정음 창제와 연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이 신미를 세종대왕께 소개했다고 해야 그나마 비빌 언덕이 생기는 데 문제는 이와 관련된 기사나 기록 역시 전혀 없다.

그럼에도 정광 교수와 같은 모방-공동 창제론자들이 신미라는 승려를 고집한다. 여기에는 한가지 집히는 대목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불교 신자이거나 불교와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훈민정음과 한반도 불교를 어떻게든 연결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불자가 가장 피해야 하는 ‘아집’과 ‘욕심’을 하나 가득 떠안고 있는 셈이다.

파스파 문자

신미라는 승려와 훈민정음 창제를 연결할 수 있는 직접 사료와 기록을 제시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불쑥 원나라 때 만들어진 파스파 문자를 그 증거라며 끼워 넣었다. 이들은 성호사설에서 이익이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증언도 하고 있고,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에 비슷한 모양의 글자도 존재하니 모방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파스파 문자가 훈민정음과 같은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문자이며 철저하진 않지만 모음과 자음이 구분하여 표기하니 훈민정음이 먼저 만들어진 파스파 문자를 참조하고 모방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한다. 논리적 비약도 서슴지 않는다. 파스파 문자를 만든 사람이 승려이기 때문에 승려인 신미가 파스파 문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신미가 범어와 범자에 능통했다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몽골제국 때 만들어진 문자인 파스파 문자에 해박했다는 기록은 없다. 파스파 문자는 파스파라는 승려가 만들기는 했지만, 불경 번역을 위해 만들었던 문자가 아니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이 황제의 위엄을 보이고 자신의 명령을 한 자도 틀림없이 피정복지에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글자였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자까지 조선의 승려가 공들여 공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불경이 기록된 범어와 범자면 충분하다. 하지만 모방-공동 창제론자에게 이 정도 논리적 결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 대중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의 관련성을 과장하고 그래서 신미가 훈민정음의 결정적 공동 창제자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가장 심오한 우주론적,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근거도 없이 훈민정음과 불교를 연계하려는 정광 교수의 주장은 진화론을 배척하는 기독교의 창조과학처럼 아주 천박한 유사 과학처럼 보인다. 또한 자기 성취에 자부심을 갖기보다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비하하려는 습성이 구조화된 식민사관의 어두운 그림자도 감지된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불교는 인류 문명사와 한반도 문명사에 충분히 공헌했고 공헌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신미를 훈민정음 창제와 연결하기 위해 동원하는 몽골제국의 파스파 문자에 대해 알아보자.

<계속>

주.

1. 조선왕조실록은 신미를 늘 간사한 중, 간승(姦僧)으로 묘사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불교를 권력 구조에서 완전히 배척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이 지배하던 억불숭유의 세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도 그 평가가 너무 야박하다.

2.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는 간접 증거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훈민정음을 기록한 문건이 있다며 좀 시끄러웠던 사건이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전에 발간된 ‘원각선종석보’라는 문건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훈민정음으로 유추되는 문자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는 아주 조악하게 만든 위작으로 판명 났다.

3. 고려처럼 조선 시대에도 승직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계 안에 있던 관직이다. 세종대왕은 집권 초기 조선 불교를 선종과 교종으로 정리하고 3년마다 승과 시험을 쳐서 승직을 내렸다. 승직은 왕이 사사로이 내린 직함이 아니라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공식적으로 부여된 공적 직위였다.

4. 문종 이후 세조실록이나 성종실록에 신미가 등장할 때도 훈민정음이 아니라 왕실이 신미를 특별 대우하고 불교에 상당한 지원을 하며 생기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 불교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재정적 지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성종 때까지 살았던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 때문에 조선 왕실은 성종 때까지 불교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고려 때에 비해 조선 초기 불교의 위세는 초라하게 위축되었지만, 효령대군과 세조의 관심 덕분에 승려들은 왕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절을 만들 수 있었다. 백성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때 효과적으로 쓰인 것이 왕이나 왕실 가족이 서명한 권선문, 불교에 입각해 선업을 권하는 문서였다. 당시 승려들은 조금이라도 지원을 더 받기 위해 권선문에 찍힌 왕의 어압(서명)과 왕실 가족 구성원의 인장을 위조하곤 했고 당시 이는 제법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5. 조선의 출판 사업에서 가장 많이 동원된 집단은 승도라 불리는 승려 집단이었다. 이들이 국가 출판 사업의 중추 인력으로 동원된 것은 이들이 한자를 알고 있던 지식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부터 세조 때까지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된 사업에 불경이 중심이 된 것은 당시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며 훈민정음을 보급할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이 승려 집단 외에는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되고 보급 과정에서 불경을 위주로 번역된 것은 초기 조선 왕실의 불교 편향뿐 아니라 이런 사회적 배경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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