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아래 모인 한의사들 “마음 드러낸 성소수자에게 한 발 더 가까운 진료를”

2024-10-09

올해로 12년차 한의사인 김지민씨(42)는 ‘탑 수술(유방 절제술)’을 준비 중인 트랜스젠더 남성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졌다. 수술 후 흉터 재생을 위해 한의원을 찾고 싶다는 그의 말에 김씨는 “10년 넘게 진료를 봤는데 성소수자 진료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자책했다. 이후 고 변희수 하사와 고 이은용 작가가 잇따라 세상을 등지며 김씨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김씨와 같은 뜻을 가진 한의사와 한의대생들이 각자의 고민을 얹었다. 3년차 한의사 신채영씨(28)는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성소수자의 질환 등을 한의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한의사 주희씨(활동명·33)도 학부생일 때부터 한의학계의 성소수자 관련 연구를 알아보다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홍(虹)’자에 보약 ‘공진단’을 합친 ‘홍진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2022년 연대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만난 홍진단 소속 한의사들은 성소수자 한의학에 필요한 것이 소수자 친화적인 진료 환경을 마련하는 것, 또 소수자성에서 비롯되는 질환을 이해하고 진단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씨는 “처음에는 성소수자라고 질환을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실제 성소수자 환자들을 만나보고선 생각이 달라졌다”며 “본인을 편하게 드러냄으로써 상담·치료도 더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한의학은 몸과 마음이 다 연결돼 있다는 관점으로 환자를 대하기 때문에 통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홍진단은 지난 7월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일일 한의 진료소’를 열었다. 진료소를 찾은 한 트랜스 남성 청소년이 ‘젠더 디스포리아(출생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아 겪는 신체·사회적 불쾌감)’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했다. 신씨는 이 환자에게 일과를 조금씩 바꿔보는 과제를 주고 명상치료를 제안했다. 가족에게 성소수자임을 밝힌 후 갈등이 심해져 아토피가 생겼다는 환자에게는 탕약을 처방하기도 했다. 김씨는 “특히 트랜지션(성전환) 중인 트랜스젠더의 경우 남성호르몬 투여 이후 피부염이 생기면 약침 치료를 하거나, 성확정수술 후 기력이 저하되면 보약을 처방한다”고 말했다.

홍진단은 성소수자들이 겪는 정신건강 문제도 주목한다. 성소수자들은 스트레스와 우울감, 불안장애 비율이 높은 편이다. 성소수자인권단체 다움의 2022년 연구 보고서를 보면 성소수자 청년의 49.8%는 ‘최근 1주일 내에 우울 증상을 겪었다’고 답했다. 41.5%는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해 봤다’고도 했다. 신씨는 “정신적인 아픔을 호소하는 성소수자 환자들은 가정환경과 성장 배경을 듣고 상담·치료를 병행하면 경과가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한의대생 송모씨(24)는 “한의학은 인체를 표준화하지 않고 다양한 몸을 배우는 것이 장점”이라며 “홍진단 활동으로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환자가 어떤 (환경적) 맥락에서 신체 증상을 보이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의학계에서 성소수자에 특화한 진료 연구는 거의 없다. 주씨는 “한의학뿐만 아니라 중의학 등에 대해 관심 있는 교수가 개인적으로 자료를 가져와 수업하는 정도”라며 “성소수자 진료에 관한 수업이 별도로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의사들끼리 만나 환자 사례를 나눌 공론장 자체가 전혀 없는 것도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홍진단 활동이 알려지며 한의학계 내부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주씨는 “홍진단이 최근 한의사와 한의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포럼을 열었고, 예전보다 홍진단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져 보람과 기대를 느낀다”고 했다. 김씨는 “성소수자 당사자인 한의사들도 내부에서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홍진단이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홍진단은 내년 사업으로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한의사·한의원 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성소수자 진료소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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