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너는 어떤 한국인이냐” 묻는다면

2025-02-13

미국 워싱턴DC로 이어진 도로 주변의 한 시골 마을. 구덩이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군복을 입은 서너 명의 무리와 그들에게 붙잡힌 기자들이 마주한다. 빨간색 선글라스를 쓰고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복의 사내가 기자들에게 묻는다. “그래, 너는 어떤 미국인인데? (Ok, What kind of an american are you?)”

지난해 제작돼 국내에서도 연말에 개봉한 미국 영화를 봤다. ‘시빌워(civil war)’.

영화 속 미국은 제목처럼 ‘내전’ 중이다. 위헌적인 방법으로 3연임에 성공한 대통령과 그를 지키려는 연방정부, 이들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연합군들 간의 전쟁이다. 연합군도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연합한 서부군, 19개 주가 연합한 플로리다 동맹으로 나뉘며 복잡한 전황 속에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위해 워싱턴DC로 출발한 3명 기자들의 눈으로 내전이 벌어진 미국의 모습이 담긴다.

전장이 아닌 마을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살육이 자행된다. 총을 든 누구에게도 비장한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의 갈등은 느낄 수 없다. 그저 ‘어떤 미국인인가?’를 묻고 죽인다.

기대보다 재미없는 영화였지만 ‘지금의 미국이 내전 상황’이라는 설정은 섬뜩하다. 우주를 무대로 한 공상과학 영화처럼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것 같은’ 발칙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영화의 종반부 대목에서는 한 달 전 국내에서 벌어졌던 장면들과 묘하게 오버랩되면서 약간 소름이 끼친다. 전쟁에서 승리한 서부군이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으로 진입한다. 소수의 경호처 직원들만 남아 저항하지만 끝내 모두 사살된다.

영화가 끝난 뒤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어떤 겨울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지금 이 상황도 넓은 의미의 내전은 아닐까. ‘진영 간의 대립’이라거나 ‘정치적 분열’이라는 말로도 충분한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넘쳐나고 있다.

서로가 적이 돼버린 양극단의 군중. 혼란을 부추기는 유튜브 선동가들의 암약. 폭도들의 난입으로 파괴된 법원. 정치적 계산에 따라 줄을 서는 정치인. 끊임없는 메시지로 결집을 호소하는 옥중의 대통령.

승복과 존중의 태도는 이미 사라졌고 음모론과 속임수, 처단 등의 광기만 넘실거린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죽어간다.

무너지는 민주주의의 패턴을 분석한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2018)

더불어 그들은 정당의 문지기(gatekeeper·게이트키퍼) 기능이 사라진 탓에 극단주의적 선동가가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설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안국동 거리 이곳과 저곳에서 군중들의 대치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 올해 봄 이른 대선까지 치러질 공산이 크다. 심리적 내전으로 불릴 만큼 갈라진 국론이 벚꽃의 선거판을 거치면서 어떤 파열음을 낼지 걱정이 앞선다. 권력의 주변에는 분열을 즐기는 선동가들만 즐비해 보이고 이들을 걸러내야 할 정치 9단의 게이트키퍼는 보이지 않는다.

온갖 공작과 조작으로 만들어 낸 거짓 뉴스와 음모론이 세상을 덮고 그 반향실(echo chamber) 속에 갇힌 잠재적 독재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함성만이 들리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곳에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인정의 힘을 믿는 진정한 정치인과 합리적인 스윙보터들의 설자리가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자. 그렇게 민주주의가 파괴된 대한민국.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서울의 거리 어느 집회 현장에서 쇠파이프를 든 서너 명의 무리를 만난다. 그들이 내게 묻는다. “그래, 넌 어떤 한국인인데?”

영화적 상상을 넘어선 망상 수준의 장면일까. 터무니없다고 단정하기 힘든 이 우울한 현실.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놓인 것은 틀림없는데 이를 극복할 해법도, 진심으로 해법을 고민하는 누구도 보이지 않아 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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