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특집] 반구대특집⑨ 대곡리 갑을남녀(甲乙男女)(2)

2025-08-21

633호부터 10회에 걸쳐 그동안 필자가 보고 듣고 느꼈던 반구대 사람들, 그들의 소망과 욕망을 2020년부터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반구대특집 ⑧, ⑨회는 “대곡리 갑을남녀(甲乙男女) (1), (2)”, ⑩회는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크랭크-인”으로 마무리합니다.

2021년 9월, 반구대에서 아버지와 함께 도자·영상전을 열었다. 일주일 정도만 진행하려 했는데 반응이 좋은 덕에 두 달 가까이 진행했다. 그때 이석희 선생이 삼거리 주말 버스킹을 막 시작하던 참이어서 전시와 함께 공연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포스터와 리플릿에 이름을 함께 넣었다. 그게 고마웠던 모양인지 아버지에게 미니 가야금을 하나 선물해 왔다. 부모님의 집 거실에 전시되어 있다가 작년 여름부터 내 작업실에 와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 작품이다.

반구대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대곡리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그게 인연이 됐는지 그해 늦가을에 이석희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슨 서류를 만들어야 하는데 컴퓨터도 없고 서류를 만드는 게 도통 어렵다고 했다. 서류를 만지다 보니 반구대 주민들도 함께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한 장 더 만들어서 지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쌈짓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뭔가를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면접하러 갔는데 전문가가 아니라는 데 서명하는 서류가 있었다. 큰일 났다 싶어서 직업을 무직으로 쓰고 바보 행세를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면접받던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심사위원들이 그동안 작품 활동 비용을 어디에서 지원받았냐고 묻길래 사비를 썼다고 하니 다들 펑 하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가장 높은 금액으로 결정됐다. 300만 원. 지금 우리 스태프들 한 달 밥값도 안 되는 돈.

이석희 선생은 이백몇십만 원으로 결정이 났다. 훨씬 더 적은 지원금을 받게 된 단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괜스레 미안했다.

이석희 선생을 도우면서 덤으로 지원금을 받게 됐는데, 내 생애 처음으로 얻게 된 이 기회가 손도 대기 어려울 만큼 귀하고 아까웠다

신기했다. 그 돈은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아깝고 귀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일도 안 했고 기념일도 아닌데 받는 돈이었다.

이재권 이장을 포함한 주민들과 스태프들 열 명 이상 되는 밥값을 계산할 때마다 그 돈을 쓰지 못하고 사비를 털었다.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액자값도 사비를 썼고,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사진 촬영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품값도 인건비도 모두 사비를 썼다. 추가로 구매한 장비도 꽤 된다. 기름값도 인건비도 모두 사비를 썼다. 주최 측에서 아버지 도자기를 전시해 주면 좋겠다고 말해서 비용 한 푼 안 들이고 스무 점이나 깔았다.

그랬더니 돈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행사가 다 끝난 뒤 한우 파티하고 남은 지원금을 나눠주고 나니 지원금보다 더 많은 카드 청구서가 날아왔다. 결산서류는 내가 쓴 영수증으로 처리했다. 몇몇이 밑지는 장사를 왜 하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명쾌하다. 이 덕분에 오랜만에 작품 활동을 했고, 이 덕분에 반구대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 덕분에 기분도 크게 낼 수 있었으니 내 입장으로 크게 남는 장사라고. 나는 그게 지원 사업의 정의이자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전시회 “울주시공(蔚州時空)”을 통해 이영준을 네 번째로 만났고, 사람 이영준을 알게 됐다

“울주시공(蔚州時空)”이라는 전시명은 아버지가 지었다. 주민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반구마을 사람들, 한실마을 사람들, 저기 집청정에서 천전리각석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과수원 사람들. 그때가 반구대 사람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다.

그때 이영준 전 이장을 네 번째로 만났다. 사진 좀 찍읍시다. 싫다. 좀 찍읍시다. 에잇, 귀찮게. 그리곤 밀짚모자를 쓰고 나왔는데 제법 인물이 좋았다. 얼굴이 작고 가늘어서 사진‘발’을 참 잘 받았다.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인도 함께 찍었다. 그리고 논으로 향하는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익스트림 롱숏으로 한 컷 찍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카메라와 마이크를 내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악귀처럼 표현한다. 누구는 몰염치한 사람으로도 말한다. 촬영본을 모니터에서 확인할 때 그 사람은 아주 일반적이고 아주 평범한, 그저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다. 그것이 그 작은 마을에서는 악착같은 사람으로 보이게 한 것이었다.

카메라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재생했을 때 객관화된다

평생의 대부분을 카메라의 눈으로 살아왔는데 촬영본을 보면 항상 느끼는 일이, 대면하고 있을 때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도 바로 눈앞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모니터에서 보인다. 아마도 촬영 현장에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고, 모니터에는 나를 소거해 대상을 오롯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가까이에서 이영준을 들여다보니 이런 사람이더라, 하고 전했더니 입을 삐죽이면서도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 수십 년간 쌓여온 앙금이 제한적으로 전하는 몇 마디 말에 사그라들겠냐마는 어쨌든 작은 얼음 하나 깬 셈이다.

몇 달 전 대곡경로당에서 열리는 마을 회의를 촬영하러 갔다가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이영준을 보고 괜찮냐 물어보니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좋은 복대가 하나 있다고 하니까 자기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쯤 지난 뒤에 서울 삼성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인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며 한탄했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주말에 전화를 넣었더니 아파 죽겠다고 말하면서도 수술이 잘 돼서 월요일에 퇴원할 거라고 말했다. 아마 열흘쯤 지난 날이었을 거다. 촬영하러 반구대로 올라가는 길에 한우직판장에 가서 곰탕 세트를 두 상자를 샀다. 하나는 이영준 전전 이장 줄 거, 다른 하나는 이재권 전 이장 줄 거. 이영준은 몸보신하시라고 샀고, 이재권은 긴 인터뷰를 해준 게 고마워서 선물로 샀다.

그런데 이영준의 집에 갔더니 낯선 승용차가 한 대 있었다. 30대, 많아도 40대 초반이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딸인 모양이다. 곰탕을 건네니까 누구냐고 묻길래 맨날 카메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뚱뚱한 여자라고 말하면 아실 거라고 했다. 병원에 오래 계셔야 할 거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같이 간 스태프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이 안 좋았다. 아주 많이.

6년간 반구대를 취재하고 촬영하면서 나도, 그리고 반구대 사람들도 나이를 먹었다

6년 동안 나만 나이를 먹은 게 아니다. 아주 드물게 50대였던 사람들이 60줄이 됐고, 70줄이던 사람들이 80줄 가까이 가거나 넘긴 세월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촬영한 주민들의 얼굴이, 그래, 좀 많이 삭았더라.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5년 전 찍었던 사진보다 훨-씬 더.

2022년 가을 무렵 손방수와 크게 다퉜다. 엄밀히 말하면 피곤이 겹겹이 쌓여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운 내가 일방적으로 ‘지랄’을 했다. 그때 손방수 마음이 크게 다쳤을 거다. 한동안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내 인생에서 지우려는 생각까지 했다. 1년쯤이려나. 마음이 좀 가라앉고 보니 손방수가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 딱히 화해의 말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하지만 이전보다는 좀 더 어색하게 원만해지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손방수가 나를 품어준 거겠지.

그때 손방수 집 테라스에 전시돼 있던 작품들을 싹 다 걷어오면서 주민들의 사진도 함께 가져왔다.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유도봉을 흔들고 있던 이재권에게 사진을 맡겼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이영근의 집에 사진을 보기 좋은 곳에 놔둔 것을 보고 기꺼웠다.

이영근과 관련한 아주 어릴 적의 에피소드 하나를 손방수에게 들었다. 이영근과 관련한 깊은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손방수가 ‘반구대통신’으로 울산저널에 연재할 때 그걸 쓰라고 해서 소개된 적 있다. 그리고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한 장면이 되었고, 다른 역으로 섭외한 한 여배우가 콕 집었던 역할이 바로 방수 역이다.

어느 중견 여배우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에서 선택한 캐릭터는 손방수. 그리고 그의 든든한 뒷배는 이영근이다

이 바닥에서 나름 자기 위치가 있는 여배우가 급을 낮춰 가면서까지 선택한 역할. 그게 아니고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며칠 전에 매니저가 연락해 왔는데 열심히 사투리를 연습 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촬영 내내 손방수의 사투리와 연기 디렉션이 있어야 할 거다. 글자로 옮기기에 어려운 사투리와 억양이 엄청나고, 손방수라는, 확실히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아무리 연기력 좋은 배우라도 따라 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공식처럼 딱 자르기는 어렵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영근은 저쪽이었다. 몇몇 마을 사람이 말하는 ‘나쁜’ 사람 쪽. 손방수의 로맨틱한 어린 시절 추억과 동시에 손방수, 이재걸의 비극적인 반구대 삶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방수와 이영근이 친하게 됐다. 이후로 이영근은 손방수의 든든한 뒷배가 돼 줬다. 그리고 더 가까이에서 그 인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사전에 따로 연락도 없이 무작정 그 집에 찾아가 사진 좀 찍읍시다, 했다. 담배를 물고 나오면서 불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잠시만, 잠시만 하고 찍었다. 카메라의 성능 덕분에 턱수염과 잔주름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된 사진이 나왔다. 사진 촬영 기술이 좋았다면 훨씬 더 멋진 사진을 뽑아낼 수 있었을 거다.

이영근은 설정 사진을 처음 찍는 눈치였는데 배우처럼 자세를 잘 잡았다. 사진 찍으라고 최소한 10초 이상을 유지하면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입가에 갖다 댄 손, 카메라를 도전적으로 바라보는 눈. 둘 중 하나겠지. 황당해서 잠시 멈췄거나, 아니면 카메라 렌즈를 즐겼거나. 그때부터 이영근은 반구대 숀 코네리가 됐다.

사람은 타인에게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스스로 판단했을 때 바르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작년 촬영감독이 다른 작품에 다녀오느라고 반구대의 추수 시기를 놓쳤다. 전체 논농사 면적이 작아서 트랙터가 짬이 날 때라야만 추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아차 하는 순간에 반구마을 추수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물어물어 찾아낸 곳이 한실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삼 형제의 논이었다.

그렇게 자주 올라가서 촬영했는데도 박삼식이 현장에 계속 함께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나를 봤다는데 나는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둘째 형님에게 볏단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사진을 찍은 뒤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준 일을 알고 있었고, 첫째 형님에게 아직 베기 전 허리까지 오는 벼 사이를 걸어 다니라고 요청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한국전력에 취업해 일하다가 전봇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고 한다. 사람 선입견이라는 게 참으로 사악해서, 그렇게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머리도 다쳤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군소리 한마디 없이 사연호에 배를 띄워 드론을 되찾게 도와준 삼식의 일화는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도입부의 중요 에피소드가 되었다

지난번 촬영감독의 드론이 떨어졌을 때, 유네스코 등재 직후 반구대암각화가 물에 잠길 만큼 물이 가득 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사연호에 배를 띄워 도와줬다. 토씨 하나 달지 않고 도와준 게 깊이 고마워서 함께 식사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사람이 너무 멀쩡해서.

저녁에 우리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하자고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 우리는 모두 막걸리 한 잔 더 하시고 깊이 주무시나 보다, 했다. 다음 날 전화를 해와서 하는 말이, 우리가 힘들까 봐 그냥 두고 온 배를 혼자 가서 옮기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기왕 찍는 거 이런 것도 찍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눈물겹게 고마웠다.

덕분에 <반구대 사피엔스>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하면서 도입부를 유연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에피소드를 통해 주인공이자 내 페르소나의 반쪽인 다큐멘터리 감독 이정민이 반구대에 녹아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박삼식은 그 장면에서 꽤 멋지게 등장하고, 장막 뒤에서 이재권이 더 멋지게 등장한다.

한때 손방수와 전화로 수다를 떨면 밤을 새우곤 했다. 반구대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청사진을 그리고 수다 떠는 게 재밌었다. 작년부터 너무 바빠서 밤새는 통화는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작정한 날엔 두세 시간이 기본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언니. 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반구대 사람들이 눈에는 눈물이 고이면서도 활짝 웃으면서 화해하는 장면이 됐으면 좋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겠다.

손방수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살아간다. 그게 삶이다. 케세라세라

손방수는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나가는 지금 불가능할 거라는 손방수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마지막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멀어지고, 그러는 사이에 화해도 있고 다툼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래서 <반구대 사피엔스>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 계기를 통해 화해를 하지만 다음날 다시 으르릉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게 사람다운 게 아닌가. 영화 문법 지키느라 억지스럽게 풀칠해서 갖다 붙이는 건 아무래도 인위적이다.

언젠가는 몽돌처럼 무뎌질 것이고, 그때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차면서 다시 그들과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케세라세라.

※그동안 반구대특집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642호에서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크랭크-인으로 반구대특집을 마무리합니다. 못다 한 더 많은 이야기는 기회가 될 때 더 풀어보겠습니다. 제 영화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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