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23년 12월 드라마 ‘경성크리처’가 일본에 공개되자 일본 시청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연 배우 박서준을 보려고 드라마를 시청했는데, 생각하지 못한 설정에 당황한 것이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를 통해 일본 열도의 핫스타로 부상한 박서준이 왜 이런 드라마에 출연했는지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성크리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경성에서 발생한 부녀자 실종 사건의 배후에 괴생명체가 있었고, 그 괴생명체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 시청자들은 일본군이 이런 괴생명체를 만들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군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했다니.
괴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허구일지 모르나 생체 실험은 다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너무도 쉽게 731부대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731부대의 만행을 일본 젊은 세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인지한 것이다. 박서준의 출연 덕분에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일본 제국주의가 생체실험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2024년 7월에는 ‘경성크리처 시즌 2’가 공개되었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제국주의적 음모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요컨대 ‘경성크리처’는 비록 미국 자본과 유통망을 통해 일본에 진출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진실을 알리는 면에서는 교육이나 정치로도 하지 못한 성과를 낳은 셈이다.
이런 현상은 영화 ‘하얼빈’에서도 이어진다. ‘하얼빈’은 117개국에 수출이 되었는데, 일본도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추앙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그린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현빈이라는 한류스타의 출연이 한몫했다.
현빈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일본 열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한류스타의 입지가 공고해졌고, 그를 보기 위해 한류 팬들은 영화 ‘하얼빈’의 개봉을 기다렸다. 현빈 같은 한류스타가 출연한 영화를 일본 극장 자본이 외면할 수는 없다. 일본인이 이 영화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주의자나 극우 세력이 주장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빈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북한 장교 리정혁을 열연해 호평 받고 인기가 치솟았다. 일본에서 북한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대단한 이미지 쇄신 효과를 낳았다. 이에 비추어보면 영화 ‘하얼빈’ 역시 안중근 의사의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충분히 할 것으로 보인다.
한류스타인데 안중근 배역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느냐 질문을 받자 현빈은 “그런 부담감은 1%도 없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제가 (출연을) 고민한 것은 안중근 장군의 존재감 때문이다. 일본과 관련된 우려는 (저보다) 주변에서 더 많이 한 것 같다”라며 “영화 (내용) 자체는 우리나라의 아픈 기억이고, 그런데도 잊으면 안 되는 기록이다. 우리나라를 자리 잡게 해주신 한 분을 연기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런 각오와 결기에도 자칫 현빈의 일본 활동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지 모른다. 박서준 역시 일본에서 더 인기 있을 로맨스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크리처물에 출연했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한 배우들의 이런 선택을 더 많이 응원하고 격려했으면 한다. 단지 관객수나 시청률, 글로벌 순위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한류스타라면 영화 ‘하얼빈’에 흔쾌히 출연할 수 있었을까. 배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미디어 콘텐츠 환경이 달라졌다. 이제 드라마나 영화가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공개된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었고, 그것을 활용해 비즈니스와 역사 바로잡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문화 미디어 콘텐츠 산업이 역사적 사실을 넘어 진실을 다루면서 인류 공영의 보편적 가치를 융합하도록 시청자들의 응원과 지지가 필요하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 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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