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안돼" 전투기 만드는 회사, CEO는 엔지니어여야 한다 [박수찬의 軍]

2025-05-22

오는 9월 임기가 끝날 강구영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의 후임을 놓고 정치권과 방산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KAI 최대주주는 국책은행인 한국수출입은행으로 지분 26.41%를 갖고 있다. 정부 지분이 높은 KAI는 정권이 바뀌면 사장도 교체되어왔다.

이 때문에 대선 국면에서 KAI 사장은 후보 캠프에 참여한 예비역 장군이나 전직 관료의 ‘핫스팟’이 됐다. 처우나 지위 등에서 KAI 사장이 그만큼 매력적이란 의미다.

강 사장도 공군 중장 출신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국방 자문을 맡았다. 윤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22년 9월에 임명됐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강 사장의 후임이 정해질 가능성이 크다. 각 후보 캠프 안팎에서 KAI 사장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들리는 이유다.

업계 등에선 KAI나 항공우주산업과 연고가 없는 ‘낙하산 사장’ 부임이 반복되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항공우주산업 발전과 리스크 관리 등을 위해 KAI 내부 사정에 밝고, 엔지니어링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인물이 KAI를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낙하산 사장’은 그만

1999년 KAI가 탄생한 이래 취임했던 사장은 대부분 관료 또는 군 출신이었다. 취임 이전까진 항공우주산업 관련 경험이 많지 않았다.

2대 길형보 사장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이었고, 3대 정해주 사장은 산업자원부 관료 출신이었다. 4대 김홍경 사장은 산업자원부 차관보 출신이자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이었다.

6대 김조원 사장은 감사원 사무총장, 6대 안현호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관료 출신이었다.

이같은 ‘낙하산 인사’는 기업 규모와 매출이 작았던 KAI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KAI는 T-50 계열 항공기와 KF-21 전투기, 수리온·소형무장헬기, 무인기·위성 등을 만드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6세대 전투기와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기술 개발의 주역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기업 규모가 커지고 성장이 지속되며 기술 수준이 고도화하면, 기업 조직 내부 특성과 의사결정과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기존에 겪어보지 못했던 문제와 의사결정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한 대처는 기업 흥망과 직결된다. 순간의 선택이 기업을 살리기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때 CEO 역할이 중요하다. CEO가 자신의 조직과 업무 특성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어야 리스크를 제때 관리·회피하며 성과를 낼 수 있다. 조직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내부인사 출신 CEO를 국내외 재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방산업계도 마찬가지다. K-9 자주포 등을 만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손재일 대표는 1990년 한국화약에 입사, 30여년간 한화맨으로 근무하며 방산부문에서 경험을 쌓았다.

2023년 12월 퇴임했던 김지찬 전 LIG넥스원 대표는 1987년 금성정밀공업(現 LIG넥스원)에 입사, 사업관리·개발·전략기획 등의 업무를 두루 거쳐 대표를 역임했다. 첨단 무기 개발·양산 현장에서 오랜 기간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평가받았다.

미 공군 B-2·B-21 스텔스 폭격기 제작사인 노스롭그루먼의 캐시 워든 CEO도 내부에서 오랜 기간 실무를 밟으며 성장했다.

조직 내부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으며 성장한 인재가 CEO가 된 기업은 기술과 매출, 인수합병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KAI는 첨단 기술의 집합체로 불리는 전투기·헬기를 제작하는 국내 유일의 업체이자 K방산의 선두주자다. 국내외 항공우주산업 기술과 인력, 공급망이 총집결하는 기업이다. 그만큼 문제와 의사결정 수준도 다른 기업보다 복잡하다.

실무진부터 최상층에 이르는 조직 내 모든 분야를 경험한 사람이 KAI의 리더십을 맡아야 효율적 의사결정과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다. 이는 기업 경영에서 더 큰 성과로 이어진다.

◆“KAI가 아니면 안간다”가 필요하다

항공우주산업체 핵심 역량은 항공 엔지니어링이다. 엔지니어는 기업의 중심이고, 회사의 핵심 의사결정은 엔지니어링에 기반해야 한다. 이를 간과한 기업은 위기를 피할 수 없다.

보잉의 몰락이 대표적 사례다. 옛날엔 “보잉이 아니면 안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잉은 최고의 비행기를 만들려는 엔지니어가 중심을 이뤘고, 보잉 항공기는 최고의 품질을 갖췄다.

하지만 1997년 맥도널 더글러스를 인수하면서 경영진은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강조했고, 엔지니어들은 압박을 받고 밀려났다.

이로 인해 누적된 각종 문제는 2018~2019년 보잉 737 맥스의 추락사고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보잉 737에선 숱한 결함이 불거졌다. 보잉 유인우주선 스타라이너도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보잉은 지난해 엔지니어 출신인 켈리 오트버그 CEO를 선임했다. 항공기 제작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과 리더십 요소는 엔지니어링이라는 원칙을 소홀히 했던 대가를 크게 치른 셈이다.

KAI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느긋하게 관리하는 경영 스타일은 사치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코로나19로 무너진 글로벌 항공우주·방위산업 공급망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장비나 부품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이 코로나19 전보다 길어지고, 비용도 상승하는 모양새다.

폴란드에 수출할 FA-50PL은 당초 올해 말부터 인도하려 했으나 늦어질 전망이다.

FA-50PL에 탑재할 미국산 팬텀스트라이크 능동전자주사(AESA) 레이더는 최근에야 첫 시험비행을 했다. 레이더와 전자장비, 항공무장 등의 체계통합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추가될 가능성도 있다.

최근엔 약 1조원 규모 UH-60 성능개량 사업에서 대한항공에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내줬다. 국내 유일의 헬기 제작사인 KAI는 UH-60 원제작사인 시콜스키와 손을 잡았지만, 우선협상대상자는 대한항공에 넘어갔다.

공군 전자전기 개발, UH-60 헬기를 대체할 차세대 기동헬기 개발, 유·무인복합체계 구축, KF-21 블록3를 비롯한 차세대 전투기 프로젝트 등도 준비해야 한다. 모두 고도의 엔지니어링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KAI 엔지니어들은 국내 항공우주산업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지녔다. 항공기에 대한 열정도 높다. T-50과 KF-21, 수리온이 탄생한 것도 엔지니어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열정 덕분이다.

하지만 사나운 사자 무리도 양이 이끌면 맹수의 기질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수한 엔지니어 집단이 있어도 리더십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면, 그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하기가 어렵다.

KAI 내부 사정에 정통하고, 엔지니어링 경험과 기술을 갖춘 리더십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래야 엔지니어들을 제대로 이끌고, 군과 기업 및 정부가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현재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재직 중인 류광수 전 부사장은 이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다.

류 전 부사장은 서울대 항공공학 학사와 석사 출신 베테랑 엔지니어다. 지난 1988년 KAI의 전신인 삼성항공에 입사한 이래 KAI에서 30여년을 일했다.

T-50 등 국산 항공기 개발에 매진했고, 다수의 전투기 항법 관련 개발에 참여했다.

FA-50과 KF-21 개발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FA-50 국산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2016년부터 시작된 KF-21 체계개발과 해외 공급망 관리 등을 진두지휘했다. KF-21 설계와 시험, 생산 등을 총괄했다.

강 사장이 취임한 2022년 9월 해임됐을 때, KAI 안팎에선 “엔지니어가 정치적 논리에 희생된 것 아니냐”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그만큼 그의 경력과 전문성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의미다.

1999년 탄생한 KAI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를 위해선 기술과 엔지니어가 중심이 되는 경영 기조가 필요하다. “KAI가 아니면 안된다”고 할 정도로 국내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자연스레 KAI에 모여들어 최고의 항공기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고, 개발도상국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다.

그 시작은 항공 엔지니어링에 기반한 리더십 구축이다. KAI 사장을 둘러싼 인사의 무게감이 작지 않은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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