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고생했어요.”
12일 오후 3시 30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미국 이민당국에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속속 입국장에 들어서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시민들의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일부 근로자들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거나 엄지를 들어 보였고, 가족들에게 벅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아빠 왔어, 괜찮아”라고 인사했다. 이들은 대부분 LG에너지솔루션(LG엔솔)과 현대엔지니어링 본사 및 협력사 직원들이다. 이날 귀국편 비행기에는 외국인 근로자 14명(중국 10명, 일본 3명, 인도네시아 1명)도 포함돼 있었다.
근로자들이 가족들과 상봉한 장기주차장은 금세 눈물 바다로 변했다. 남편을 마중 나온 한 여성은 ‘○○아빠 고생했어요’라는 머리띠를 쓰고 있다가, 남편을 발견하자마자 눈물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주변에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지방에서 올라온 일부 협력업체 임원들은 귀국한 직원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며 “고생 많았다”며 등을 두드렸다. 중국 국적 근로자는 서툰 한국어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와 함께 이동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수돗물 마시고, 휴대폰 못 쓴 ‘일주일 악몽’
체포 순간부터 이후 구금 상황에 대해 근로자들은 놀랍고 참담했다고 전했다. 조영휘(45) LG엔솔 엔지니어는 “수갑을 채우거나 몸에 줄을 감는 걸 보고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며 “2인 1실에서 숙식과 변기를 다 하도록 돼 있어서, 공개된 곳에서 변기를 함께 써야 했다”고 전했다. LG엔솔 협력사 소속 구교성 엔지니어는 “일하다가 갑자기 우르르 끌려 나갔다”며 “식사로 콩 수프, 식수로는 수돗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안전이 확보돼야 현장(조지아 공장)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부 근로자들은 복용 중이던 약을 구금 과정에서 소지하지 못해 건강이 나빠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귀국 비행기에서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에 배정됐다. 특히 구금된 다수는 휴대폰을 빼앗기거나 연행 직전 ‘전원을 끄라’는 지시를 받아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황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변호사를 선임했더라도 하루 면회 인원이 제한된 탓에 접견이 무산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규모 협력업체 소속 근로자들은 아예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기도 했다.

“최정예 빠지면 가동 불가능”…현장 차질 불가피
직원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다행이지만, 기업들은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데다, 해결되더라도 미국에 출장 보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전격적인 단속은 공장 건설이 장비 설치와 시운전 준비 단계에서 이뤄졌다. 통상 우리나라 엔지니어들이 장비를 가동해본 뒤, 미세조정을 하고 현지 엔지니어들을 교육하는 과정을 거쳐 철수하지만, 이번에는 시운전 단계에서 멈췄다. 일부 장비는 협력사 최정예 인력이 아니면 세팅조차 불가능한 특수 공법이 적용돼 대체 인력 투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관건이다.
LG엔솔의 한 협력업체 임원은 “숙련 엔지니어가 빠지면 사내에서도 대체 인원이 없을 정도라 몇몇 사람이 아니면 장비 가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수요 둔화 속에서 이번 합작 공장에 장비를 납품하며 활로를 찾던 협력업체들은 공정 중단으로 대금 지급이 연기될까 불안해하고 있다. 체포 당시 현장이나 숙소에 두고 온 렌트 차량, 소지품도 그대로 방치돼 이를 정리하는 것도 숙제다. 이번 사태와 관련된 협력업체 34곳은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공정 재개 및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날 인천공항에서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는 공사 일정 차질 우려에 대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전용 비자’의 벽, 이번엔 넘을까
이번 사태의 핵심은 상용 비자(B1)의 ‘모호한’ 적용 범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지에 있다. 이날 인천공항에서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구금 사태의 원인과 관련해 “B1 비자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양국 간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B1 비자는 설비나 시설 초반은 가능하게 돼 있고 이스타(ESTA) 비자도 일정 정도 그에 준해서 움직인다고 전제돼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에서 공장을) 건설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면서 “그런데 이번에 미 당국이 클레임(이의)을 걸어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미국 ICE의 분류 기준이나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12일(현지시간) “체포·구금된 한국인 근로자 1명은 합법적인 비자에 근거해 고용된 상태였다”며 “그럼에도 ICE 현장 사무소장이 그를 ‘자발적 출국자’로 분류토록 명령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 방식과 인력 운영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민경훈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 교수는 “이번을 계기로 B1 비자를 유연하게 운용하고, 미 의회에 계류 중인 ‘한국동반자법안(Partner with Korea Act)’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유사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동반자법안은 한국인 전문인력 취업 비자(E4)를 신설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012년부터 미 의회에서 추진됐나 미국 내 이민정책의 변화, 미국인 일자리 보호주의 등의 영향으로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