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1000룡'이 자라고 있다…딥시크의 고향 항저우가 한 일 [르포]

2025-03-03

#1. 유니트리는 중국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의 로봇 제작업체 중 최근 가장 주목 받는 기업이다. 지난달 25일 유니트리 본사에서 만난 휴머노이드 로봇은 등을 대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걸었다. 올해 춘절 연휴에는 로봇 여러 대가 손수건을 높이 던졌다 받는 '칼 군무'를 선보여 중국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키 180㎝, 무게 47㎏인 로봇 'H1'을 인공지능(AI) 기반으로 3개월간 훈련시킨 성과였다.

#2. 같은 날 오후 방문한 딥로보틱스도 항저우를 대표하는 로봇 기업이다. 탐사·구조·소방 등의 작업에 활용되는 4족 로봇이 주력이다. 로봇개 형태로 경사 50도의 가파른 계단이나 자갈밭 험로도 막힘 없이 달린다. 이미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 지하 전력 터널에서 이상 현상을 감지하는 업무를 완수해 주목받았다.

세계가 항저우의 AI 산업을 주목하고 있다. 항저우에 본사를 둔 '중국판 챗GPT' 딥시크가 주목받으면서다. 챗GPT 개발비의 5.6% 수준인 600만 달러(약 88억원 추정)만 써서 가성비 높은 성과를 냈다고 알려지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그런데 항저우엔 딥시크처럼 주목받는 기업들이 있다. 이른바 ‘AI 6룡’이다. 로봇 업체인 유니트리와 딥로보틱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업체 브레인코, 게임업체 게임사이언스, 3D프린팅 업체 매니코어 등이다. 이중 로봇 선두주자인 유니트리와 딥로보틱스를 최근 방문해 중국의 ‘AI 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니트리 창립자 왕싱싱(王興興·35)은 대학 때 만든 200위안(약 4만원)짜리 로봇 개로 업계에 발을 들였다. 석사 졸업 후 세계적인 드론(무인기) 기업 DJI에 입사했지만, 창업 갈증이 컸다고 한다. 결국 2개월만에 DJI를 박차고 나와 세운 유니트리는 9년 만에 기업가치 80억 위안(약 1조6046억원)이 됐다. 중국의 가오궁(高工) 로봇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이 회사가 만든 4족 로봇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60%에 육박한다. 왕싱싱은 지난달 17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연 민영기업 좌담회에 우수 기업가 6인으로 뽑혀 참석하고 연설도 했다.

딥로보틱스 창립자 주추궈(朱秋國·43) 대표는 발표한 논문이 40건, 특허가 40건일 정도도 '기술 강자'로 불린다. 그는 항저우 AI 산업의 산실인 저장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회사 경영까지 동시에 하고 있다. 이 회사의 로봇 개는 400여개 프로젝트를 완수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다. 공안(중국의 경찰 조직)에도 납품 중인데, 범죄 예방 등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뿐만 아니다. 항저우엔 '넥스트 6룡'을 꿈꾸는 기업이 즐비하다. 지난달 26일 만난 중국 1위 AR(증강현실) 안경 기업 로키드는 '7룡'을 자처한다. 특허만 359개인 로키드는 지난 1월 미국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에서 혁신상을 받았다. AI 기능을 겸비한 AR안경 '에어'(무게 49g)가 대표 상품이다.

AR안경을 쓰고 "지금 앞에 보이는 게 뭐지"라고 물으면 안경이 답을 하고 사진을 찍어 문자로 전송한다. AI 다국어 번역, 질의응답, 검색이 가능해 외국어 간판도 바로 번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항공기 기체나 소방 분야의 경우 방대한 규정집을 일일이 뒤질 필요 없이 작업 현장에서 손쉽게 검색해준다. 로키드의 왕징원(王婧雯) 매니저는 "원격 의료, 박물관 전시물 설명, 바리스타 수업 등 활용처가 무궁무진하다"며 "앞으로 AI 비서 기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항저우시 "정책자금 15%는 무조건 AI에"

중국의 지난해 AI 특허 출원 건수는 1만3000건으로, 미국(8600여건)을 크게 앞섰다. 중국은 2017년 차세대 AI 발전계획을 세우고 3단계 로드맵 달성에 돌입했다. 2단계(2025년)에선 AI 핵심 산업을 4000억 위안(약 80조원) 이상, 3단계(2030년)엔 1조 위안(약 200조 5800억원) 이상으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는데 2단계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AI 핵심산업 규모는 6000억 위안(약 120조3480억원), 관련 기업 수는 4500여개다.

특히 항저우의 AI 발전은 중국 내 1~2위다. 항저우에는 AI 관련 기업이 569개에 달하는데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유니콘 기업'만 15곳이 넘는다.

항저우는 정부·기업·대학이 함께 AI 생태계를 만들었다. 정부가 밑그림을 그리면 기업은 혁신하고 대학은 인재를 키운다. 우선 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한몫했다. 지난 1월 발표된 '항저우 AI 산업체인 고품질 발전 행동 계획(2024~2026년)'에 따르면 항저우시 경제정보기술국은 내년까지 AI 산업단지 10곳을 짓고, 오픈소스 모델 AI 기업 1000개를 유치할 계획이다.

항저우시는 말보단 투자를 앞세운다. 지난달 시 정부는 관련 기자회견에서 산업정책자금을 지난해 490억 위안(약 9조 8284억원)에서 올해 502억 위안(약 10조원)으로 늘린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15%는 AI, 휴머노이드 등 첨단 산업에 집중 투자할 방침이다. 유니트리가 있는 빈장(滨江)구도 재정의 15%를 매년 "첨단 산업과 혁신에 할당한다"는 구(區)법률을 제정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항저우 무역관에 따르면 항저우시 정부는 프로젝트별 최대 500만 위안(약 10억원)을 지원한다.

야오가오위안(姚高員) 항저우시 시장은 중국중앙방송(CC-TV)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학기술 투자만큼은 절대 줄일 수 없다"며 "혁신이야말로 항저우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공학박사 출신인 류제(劉捷) 저장성 성장은 지난해 "항저우는 AI 혁신의 중심지가 돼야 한다"며 "이것이 '황금 20년' 발전 티켓"이라고 말했다. 류 성장이 연 조찬간담회엔 알리바바, 방범카메라(CCTV) 세계 1위 하이크비전 등 현지 기업인이 대거 초청됐다. 하이크비전은 방범카메라에 AI를 접목한 'AI 통합보안 솔루션'을 개발한다. 그는 간담회에서 “기업은 고품질 경제 발전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업인이 가장 귀중한 자산”이라고 치켜세웠다.

시 정부는 해결사도 자처한다. 홍콩 명보에 따르면 유니트리는 2017년 시 정부로부터 2000만 위안(약 40억 1160만원)을 지원받고 저장대의 실험 설비까지 사용해 기술 병목 현상을 뛰어넘었다. 직원의 주거 사정도 해결해줬다. 황자웨이(黃嘉瑋) 유니트리 마케팅 이사는 “직원들이 8000위안(약 160만원)씩 내야 하는 월세를 1500~2000위안(약 30만~40만원)만 내도록 시 정부가 지원했다”고 전했다. 한때 미국에 둥지를 틀었던 브레인코도 2018년 항저우로 넘어오면서 3년간 면세 조건에, 5000㎡ 연구개발공간 등을 지원 받았다.

2020년 시작한 '시후(西湖) 영재계획'에 선발된 창업가는 최대 1000만 위안(약 20억원)을 지원받는다. 최대 3000만 위안(약 60억 1740만원)의 융자는 덤이다. 사무실 지원과 함께 주거비, 자녀 교육비, 의료비 혜택도 있다. 55세 미만 중에서 해외 석·박사나 중국 국내 대학 박사학위가 있으면 된다. 명단엔 영어 이름도 보인다. 국적 제한이 없어 외국인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항저우시는 항저우 내에서 일자리를 찾는 취업준비생들에게 7일간 무료 단기 숙박도 제공한다. 타지 인재까지 빨아들이기 위해서다. 이를 두고 CC-TV는 "항저우는 구체적이고 사소한 것부터 해내는 DNA가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시 정부 보고서에는 "AI와 의료·금융·제조·뇌과학·로봇·커넥티드카 등을 접목하라" "서버 비용을 낮춰라" 등 깨알 같은 지시들이 담겼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항저우의 성공은 갑자기 툭 나온 게 아니다"며 "시 정부가 창업 시작부터 투자 회수까지 사업 전 과정을 돕는다. 스타트업이 고군분투하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항저우 AI 경쟁력의 일등공신은 1999년 마윈이 만든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기업 알리바바다. 알리바바의 25년치 전자상거래 데이터 덕에 딥시크 등이 탄생했다는 얘기도 있다.

항저우시는 교통(공항·철도)·에너지·배수시설 등 기초 인프라를 전부 데이터화하면서 AI 기반을 다졌다. CC-TV는 최근 방송에서 "항저우는 인재를 키우고 정책을 통해 기업 혁신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마련했다"며 "그런데 딥시크만, 항저우만 그런 게 아니다. 중국 전체가 혁신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했다.

중국이 두려운 점은 자체적으로 단점 파악까지 마쳤단 것이다. 항저우일보는 "항저우 569개 AI 기업 중 68%가 고객 서비스, 화상 인식 등에 집중돼 있고 양자 컴퓨팅 등은 부족하다"고 짚었다.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는 "한국도 K-AI 생태계를 구축하고 AI 반도체 칩 등 관련 분야를 수직계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AI 응용 분야인 의료영상·자율주행·로봇 등에 일관된 정책 지원을 하고, 규제도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저우 AI 성공 마중물은 22년 전 시진핑"

최근 중국중앙방송(CC-TV)은 특집 보도에서 항저우의 발전 비결을 아예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003년 제10기 저장성 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에서 당시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였던 시진핑(習近平)이 '디지털 저장(浙江)'을 주창했다면서다. 당시 항저우 100가구당 컴퓨터는 45.37대였지만, 인터넷이 연결된 가구는 2가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진핑의 “디지털 저장성”한 마디가 혁신에 불을 붙였단 것이다. CC-TV는 "디지털화가 저장성의 명함이 됐다"고 평했다. 시진핑의 선포가 있고 나서 저장성의 연구·개발비(R&D)투자비는 2002년 54억2900만 위안(약 1조871억원)에서 2007년 281억6000만 위안(약 5조6390억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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