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조선총독부의 항복 조인식이 끝난 후, 이어서 주한 미 육군사령부(USAFIK: US Army Forces in Korea)를 발족하였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는 미 육군 제24군단 사령부와 그 예하 부대로 구성하였다. 사령관에 미 육군 중장 하지가 1945년 9월 10일 취임하였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에서는 1945년 9월 12일부로 미 제7사단장 아놀드(Archibald V. Anold)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헌병사령관 쉬크(Lawrence E. Schick)를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주한 미 육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군정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38도선 남쪽의 한반도 지역을 통치·지도·지배하는 연합군 지휘 아래 미군에 의하여 수립된 임시정부이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한국에서 유일한 정부이다. 이 지역 내의 어떤 정치세력도 정통 정부 혹은 과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것은 미군의 남한 점령 임무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해제 외 정치경제 문제까지 확대 조정된 것을 의미하였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미군의 진주 이틀 전에 수립된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전 변형된 조선인민공화국 등 정치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의 정책은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에 대해서는 뒤에서 별도 설명)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정국은 혼란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통치 방식도 조선총독부 직제를 그대로 둔 채 일제가 임명한 공무원을 해임하지 않고 그들의 업무협력관으로 미군을 임명하여 업무를 습득하는 잠정 기간을 두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의 행정권을 인수하고도 여전히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를 비롯한 일본인 국장들이 직무를 수행하다 1945년 9월 14일에 이르러 전원 해임되었다. 하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일본인들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미군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청 주요 직위자들이 국내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1945년 10월 5일부로 일본인 고문들을 해직시키고 그 자리에 한국인 지도급 인사 11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미군정 사법기관인 대법원장에 김용무를 임명하는 등 각 행정기관장도 한국인으로 대폭 교체하였다. 12월에 들어서는 미군정청 행정기구에 미국인과 한국인을 함께 기용하는 양국장(兩局長)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때 기용된 한국인 수는 7500여 명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는 1945년 10월 1일 제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58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완료되었다. 미군이 전국에 배치가 완료된 것은, 1945년 10월 9일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때는 총 7만7645명에서 1만6000여 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미군정 기구가 안정되고 있을 무렵인 1945년 10월 17일 다음과 같은 미국의 기본 군정 지침이 일본에 있는 맥아더와 한국의 하지 장군에게 하달되었다.
"미국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에서 자유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미국의 정책은 미·소에 의한 잠정 군정기에서, 미국·소련·영국·중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거쳐 최종적으로 독립된 유엔 회원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즘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16일에는 이승만이 환국했다. 1945년 11월 23일에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 수임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 정치세력은 크게 자유민주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공산주의 체제가 확실하게 자리 잡아간 북한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