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자가 푸는 이·팔 전쟁 이야기 11: 자기 고립에 빠진 유대인의 최후

2025-07-02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이스라엘 남부에 위치한 고대 요새 맛사다

로마의 박해를 시작으로 더 이상 유대인들은 야훼가 약속한 땅에 거주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라는 절대 강국의 등장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았던, 민족적 자긍심을 기반으로 뭉친 유대인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았았던 유대인들은 맛사다 항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전세계를 배회하는 떠돌이 민족이 된다.

신은 세상을 구원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던 백성들을 이렇게까지 야박하게 쫓겨나게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신이 무능력했거나, 신이 더 이상 유대인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전자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라는 '신'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 설명이니 가능성이 낮다. 그럼 후자의 경우에 힘이 실린다.

(물론 짐작일 뿐이지만)개연성 있는 사례가 있다. 구원자, 메시아,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 불렸던 예수 그리스도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가 태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흔히 알려진 기원전 이라는 뜻의 표기 BC는 Before Christ 이고, 기원후 AD는 Anno Domini로 Anno Domini Nostri Iesu Christi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해에)라는 뜻의 약어다. 예수가 태어난 시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나누어 기술하는 건, 그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든 아니든 그 여부를 떠나 인류 역사에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한 사실임을 방증한다.

참고로, 인류는 BC보다 AD라는 표기를 먼저 사용했다. 525년, 로마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절표(Easter Table)를 만들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연호 체계를 만들면서 AD라는 표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한 AD가 처음부터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731년. 당시 브리튼 섬(현 영국) 노섬브리아 왕국 출신의 앵글로색슨 수도사 겸 신학자 비드(Venerable Bede)가 자신의 저서인 영국민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에서 AD라는 표기를 사용하면서 제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박사(Doctor of the Church)로 인정된 역사학자이자 문법학자이고 했던 비드가 AD 연도를 사용하면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BC는 AD보다 후에 사용되었다. 누가 언제 창안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다만 17세기 중반, 영국의 신학자 중 역사와 연대기와 관련한 연구를 하던 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데 에는 이견이 없다. 과거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AD 이전 시대를 표시할 필요가 생겼고, AD 이전, 즉 예수의 해 이전이라는 의미의 BC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8세기 부터는 유럽 학계에서 연대기 기록과 역사를 기술할 때, BC/AD 체계가 표준적 시간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는 BC/AD 표기가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의견이 많아 새로운 표기를 도입해 함께 사용 중이다. BC 는 BCE(Before Common Era, 일반 연호 이전)로, AD는 CE(Common Era, 일반 연호)다. 학술적인 객관성을 위해 대체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BCE와 CE도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기준이기 때문에 표기상의 차이일 뿐 BC/AD와 의미 차이는 없다. 역사가가 주목한 사건과 그에 대한 판단, 그리고 사실의 선택과 선택된 사실의 해석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가의 서술이 실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객관적 진술인가, 혹은 실제 그 사건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하다. BC/AD 표기와 관련된 사안과 예수의 역사성 문제는 다툼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네 역사라는 게 결국 역사가의 기억과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니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결론은, 예수라는 인물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 그런데 지금도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역사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정도만 인정한다. 하지만 신의 아들, 메시아 혹은 구원자와 같은 존재로의 예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유대인 형통의 한 인간으로,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 로마에 의해 정치적으로 사형에 처해진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지금도 오직 토라(תּוֹרָה, Torah)라 일컫는 구약성서의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미슈냐, 탈무드와 같이 구전 율법까지 포함한 유대 율법에 따라 신이 약속한 메시아가 올 거라 믿는다.

자기 고립과 인지적 독선

유대인들은 국가적 기틀 없이, 지역에 기반을 둔 민족이었다. 다윗-솔로몬으로 시작해, 남유다 왕국, 북이스라엘과 같이 중세의 왕국 형태로 존재한 적이 있었지만, 인류 역사에서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 만이 자신들이 영위할 수 있는 지역이라 믿었다.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 보다 어디에 살 것인가에 중점을 뒀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빼앗긴 유대인들에게 희망은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로마 박해를 피해 가나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20세기가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제대로 된 국가적 기틀을 마련할 기회 조차 갖지 못했다. 그 이유가 단지 로마라는 제국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유대인들 특유의 인지적 독선(cognitive dogmatism)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의 등장이다.

예수는 절대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 만의 절대화된 자기 확신은 민족성을 유지하는데 에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보인 인지적 독선,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다른 견해나 비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직된 인지 태도는, 확증 편향, 지식에 대한 폐쇄성 그리고 절대적 신념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히 부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악랄했다. 제자 중 하나를 돈으로 매수해 예수를 넘기게 했고, 대중에게 거짓을 퍼뜨려 여론을 조작했으며, 죄 없는 자 대신 실형 중범죄자인 바라바를 석방시키기까지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 집행이라던 당시 로마의 십자형에 처했다. 그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인류 사회가 보여준 가장 본질적인 심리와 권력의 작동 구조를 드러낸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제거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신성모독이라는 율법상의 혐의나 정치적 위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인지적 독선(cognitive dogmatism)과 체제 불안, 열등감, 질투심이라는 인간 내면의 본성이 깊게 작용하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랜 전통과 율법의 수호자라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절대화했다. 자기 신념과 해석에 과도하게 확신했고, 그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가능성(곧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해석과 시각은 진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체제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 독선은 예수의 등장을 이해하거나 대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배제와 처형이라는 극단적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사실 더욱 본질적인 동기는 질투와 열등감이다. 예수는 단지 목수의 아들이었으나 대중은 그의 가르침에 열광했다. 권위를 전통에 의존하던 지도자들은 예수가 율법의 참된 정신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실제 존경을 끌어낸 것을 두려워했다. 만약 그들이 정말 떳떳하고 내적으로 확신에 찬 권위를 지녔다면, 예수의 주장에 그저 무관심하거나 논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예수의 존재는 그들의 공허한 권위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이로 인해 더 깊은 불안을 자극했다. 불안은 시기와 질투로 번졌고, 질투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권모술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진리보다 통제가 더 중요했고, 정의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이런 폐쇄성과 배타성은 맛사다 전투에서 그 정점을 드러낸다. 자기만 옳다는 아집과 고립된 공동체는 로마에 맞서 싸우다 결국 집단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신념을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대화와 타협, 자기 성찰을 거부한 결과였다. 고립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이후 유대인은 로마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역사 속 떠돌이(Diaspora)가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고통과 방황의 역사를 겪는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표지 사진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폭력의 기원은 타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두려움에 있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공동체의 희생양이었다. 민중의 불안, 지도자들의 질투, 체제의 불확실성이 한 사람에게 폭력적으로 쏟아졌고, 그가 죽음으로 침묵당함으로써 공동체는 잠시 안정을 유지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리를 제거한 공동체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붕괴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를 죽인 이들이 꿈꾸던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예수를 따르던 소수 무리의 믿음은 수백 년 안에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며 국가 종교로 수용하게 되면서 모든 상황은 역전된다. 유대 지도자들이 두려워했던 목수의 아들 예수의 귀환이 성사 되었다.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멸시와 천대 받던 그리스도교는 점차 로마 문명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영적 권위와 문화적 위상을 확보했다. 반면 예수를 배척했던 유대 민족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수백 년 동안 떠돌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하지 않고 최소한 그를 폭력적으로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진리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논쟁했더라면 소외와 고립의 운명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외교적 고립도 어쩌면, 그 첫 장이 바로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기로 한 선택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진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거울이다.

로마는 5세기 후반에 멸망했다.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Odoacer)가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ugustulus)를 폐위 시키면서 로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로마가 끝났으니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모일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로마의 멸망이 권력의 진공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도 약 천 년간 비잔틴 제국이 로마의 명맥을 유지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했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던 비잔틴은 유대인들이 다시 모여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독선은 결국 자신을 고립시키며, 타인을 제거하려는 폭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유대 지도자들이 쥐고 있던 권력은 그들이 만든 십자가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오히려 예수의 상징이 되어 인류사의 중심이 되었다. 역사는 말한다. 진리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 진리는 오히려 부활한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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