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마르크스주의자가 본 트럼프 시대…“미국 산업 부흥? 거대한 쇼”

2025-08-17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로 잘 알려진 라디카 데사이 캐나다 매니토바대학교 정치학과 교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해 “제조업 부흥을 내건 ‘쇼’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한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만난 데사이 교수는 “미국은 ‘고립되고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high and dry)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며 이같이 진단했다.

이날 인터뷰는 데사이 교수가 국내에 곧 출간할 번역자인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세계 정치·경제 전망을 묻는 형태로 진행됐다.

데사이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온 인물이다. 이날 대담에서도 그는 “트럼프가 취임 전부터 보인 ‘관세 쇼’는 모두 자신이 ‘약속’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자국 제조업을 되살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취지다. 관세가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빅테크 등 미국 대기업들은 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일(현지시간) 반도체에 100% 품목 관세를 부과하겠다면서도 조립공장의 미국 이전을 압박해온 애플에는 관세를 면제한 바 있다. 당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아이폰 등에 들어가는 유리를 미국 켄터키주 공장에서 조달하는 등 10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순금 받침대가 있는 유리 조각품을 선물했다.

데사이 교수는 ‘관세 쇼’의 대외적 목적은 미국 제조업 부흥이지만, 본래 의도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에 담긴 감세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이 부흥하면 수입량이 줄지만, 관세로 인한 수익을 자꾸 부풀리는 것은 이런 의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트럼프가 강조하는 미국 제조업 부흥을 “순전히 허튼소리”라고 일축했다. 미국이 재산업화를 진짜 원했다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관세가 아니라 키워야 할 산업 부문을 정해 ‘선택적인 관세’를 부과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제조업 부흥을 위해 국가가 특정 산업에 자본을 집중해야 하지만 ‘자본 통제’ 역량도 트럼프 정부에는 없다는 게 데사이 교수의 판단이다.

“미국에서는 국가가 기업·자본가 계급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기업·자본가 계급이 국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요. 트럼프 시기에도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가 자본을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는 “패권국이 아닌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려고 시도하면서 비롯됐다”고 데사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시도가 미국의 위기를 낳았고 위기의 ‘증상’(Symptom)이 트럼프”라고 강조했다.

19세기 영국은 세계 전역에 자국 통화를 통용했다. 넓은 영토에 지배력을 행사해왔던 터라 영국 화폐가 자연스럽게 ‘세계의 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를 가속한 것은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의 산업화였다. 영국은 비백인 정착지였던 식민지에서 추출한 잉여생산을 백인 정착지에 수출하는 과정에서 자국 화폐도 수출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제국’으로서 다른 국가에 넘길 잉여생산이 없었다. 다만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달러를 세계의 돈으로 제공했다. 문제는 달러를 더 많이 공급할수록 미국 내 적자가 커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결국 1971년 금과 달러를 연동했던 브레턴우즈체제를 철폐하고 ‘신용에 기반한 달러체제’를 운용했다.

데사이 교수는 “이 시기부터 미국에선 금융산업이 본격화했지만, 이 금융화는 미국 탈산업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금융 시장이 커지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산업 투자는 줄며 제조업 등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데사이 교수는 현재 미국 유권자는 텅 빈 주머니와 많은 부채, 비싼 물가를 체감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달러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지점을 공략했다. 유권자들에게 미국 경제가 매우 좋지 않고 이를 ‘무역·중국·이민자’를 공격해 회복할 것이라는 ‘약간의 진실’과 ‘거짓된 계획’을 제공했고 재선에 성공했다. 데사이 교수가 “트럼프는 미국이 처한 위기의 ‘증상’”이라고 진단한 이유다.

데사이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시기 미국도 자본을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달러의 최대 고객이 세계 각국 엘리트들인데 이들이 자유로운 자본 흐름을 원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나더라도 미국의 위기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는 “트럼프가 떠나도 트럼프와 같은 누군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마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주요 소비시장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데사이 교수는 “가장 높게 측정된 통계를 봐도 미국은 세계 수입의 15.9%를 차지하고, 중국은 대미 무역이 국내총생산(GDP)의 2% 미만을 차지한다”며 “미국은 앞으로 고립되고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국가들이 내수 시장을 확대하면서 미국 시장이 점점 축소된다는 것이다.

데사이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 시대 이전인 2005년 이후부터 세계 경제 GDP 대비 대외교역 비율은 둔화했고, 개발도상국에서는 내수 시장으로 집중하는 모양새가 나타났다. 중국은 2010년대 대외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대응으로 내수 위주 자립경제 구축에 방점을 두고 내수·수출 양방향 순환을 촉진하는 중장기 경제발전 전략을 실행해왔다. 자유무역 정책이 근본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 경제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데사이 교수는 이러한 양상이 트럼프 이후 더욱 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자국을 위해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는 트럼프의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가 “트럼프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것”이며 ‘트럼프’라는 증상을 낳은 미국 위기는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사이 교수는 향후 세계 질서에 대한 접근법을 이렇게 정리했다.

“만약 발전을 원한다면, 모든 나라는 그들의 무역·투자 관계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 이익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다른 나라들과 무역·투자 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자유무역만 있다면 반드시 한 나라는 궁핍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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