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젊은 할매

2025-02-27

나의 할매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언니라 부르던 이들이 어느 순간 동네 할매가 되었다. 하기야 내가 할매 나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 중에는 손주를 두어 진짜 할매가 된 사람도 있다. 세월은 이렇게나 빠르다.

오늘의 할매는 젊다. 순전히 내 기준으로. 나보다 열 살쯤 위려나? 그런데 십오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이가 할매인 줄 알았다. 구십 도로 굽은 허리 탓이었다. 그이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내가 싹싹하게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구한 유모차를 보행기 대신 밀고 집과 논밭만 부지런히 오갔다. 동네 마실도 다니지 않았다. 체구도 자그만 양반이 보릿고개 있던 시절의 소처럼 잠시도 쉴 틈 없이 일만 했다.

일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하도 경이로워 언젠가 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지켜본 적이 있다. 고추밭의 풀을 매는 그이의 동작이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부드럽고 자유로웠다. 그 순간만큼은 허리가 굽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다. 장인의 경지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그이는 무뚝뚝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싫어하지도 않았으며 일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또래와 달리 허리가 굽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게 부끄러워 사람을 피했을 뿐이고, 먹고살기 위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농사일을 묵묵히 마주했을 뿐이었다.

외부강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몇해 전, 그이가 나를 찾아왔다. 삶은 시래기 한 덩이를 든 채 문 앞에 서서 그이는 머뭇머뭇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번이나 캐물었더니 서울 벵원에 가서 진찰이나 쫌 받아봤으먼 쓰겄는디, 라며 말끝을 사렸다. 그이에게는 전처 소생의 딸 셋과 자기가 낳은 아들 하나가 있다. 그이 성품에 배 아파 낳은 자식 아니라고 차별하며 키웠을 리 만무하다. 그 덕인지 딸네들이 자식 노릇 너끈히 하고 있다. 세탁기나 김치냉장고나 때 되면 딸네들이 새것 사 보내고, 어느 겨울에는 비싼 보약도 지어 보냈다. 그래도 한창 자식 키우며 돈 벌 때라 서울 병원 데려가달라는 말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랴부랴 척추 수술 잘한다는 병원을 예약했다.

오랜만에 쉬는 하루, 그이와 함께 서울에 갔다. 가는 내내 마음이 바빴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에 와서 쉬고 싶었다. 그이를 낯선 병원 의자에 앉혀놓고 나 혼자 뛰어다니며 수속을 밟았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더니 그이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로. 그이가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내밀었다. 신용카드였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낯선 병원에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내달리니 그이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버스나 택시를 탈 때도 그이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미 휴대전화로 결제를 마친 터라 별생각 없이 계산 끝났다고만 말했는데 신세 지기 싫어하는 그이로서는 그때부터 난감하기 짝이 없었을 터였다. 도와준답시고 시간을 냈는데 되레 그이 자존심에 상처만 입힌 꼴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이가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무려 오십만 원이었다. 반도 들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는데 그이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참고로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데 목소리가 작은 사람을 우리 엄마 말고는 그이밖에 만난 적이 없다).

정작가맨치 바쁜 사램이 시간 내기가 워디 쉬운 일이간디. 맴 같아서는 더 주고 자픈디….

그이는 여느 때처럼 말끝을 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겨울, 그이는 오이 하우스에서 일하고 일당 칠만 원을 받았다. 오십만 원이면 장장 일주일치 일당이었다. 일하고 얻어온 오이도 한 아름 덤으로 받았다. 고민 끝에 오십만 원쯤 하는 식탁을 배달시켰다. 굽은 허리에는 입식생활이 나을 터이니.

그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세상 좋아졌다는 요즘에도 허리가 굽도록 일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살면서도 사람치레 야무지게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만하면 힘들었어도 괜찮은 인생 아닌가? 어제도 우리 집 앞에 겨울 달래 한 움큼이 놓여 있었다. 한 번 받은 작은 마음 절대 잊지 않는 그이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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