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대미 안보 의존 벗어나려 재가동되는 ‘독일-프랑스 기관차’

2025-06-10

“‘외교 총리(Außenkanzler)’가 등장했다.”

지난달 6일 취임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외교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자 독일 언론은 이렇게 평했다.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추락했던 독일의 리더십을 다시 제고하려 애써 왔고, 지난 5일 첫 미국 방문에서도 성과를 거뒀다. 미국과의 대서양 관계, 그리고 프랑스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가 외교 정책의 두 개 기둥인 독일은 이제 유럽통합을 진전시키려 한다. 그래야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해왔던 안보에서 점차 탈피할 수 있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통합을 주도해왔던 독일이 보기에 통합을 전진시킬 최적의 시간은 1년 반 정도다. 2027년 봄 프랑스 대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의 국방비 증액 압박

EU, 공동 대응으로 효과 높여야

성과 내려면 독·프 협력이 필수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습은 없었다”

지난 5일 백악관에서 메르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공식 회담을 했다. 회담 후 메르츠는 무역 분쟁의 해결 필요성에 공감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하는 데 미국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월 말 트럼프는 집무실에서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모욕했지만 독일 총리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독일 측은 이번 회담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 트럼프를 만족시켰다.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트럼프는 1869년 독일 팔츠 칼슈타트에서 출생했고 미국에 이민을 갔다. 총리는 영어로 번역한 할아버지의 출생 증명서를 금박 액자에 담아 선물로 증정했다. 만면에 미소를 띤 트럼프는 집무실에 증명서를 걸어두겠다고 화답했다. 공개적으로 최대한 띄워 주고 비공개 자리에서 협상해야 한다는 트럼프 다루기의 철칙을 지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당한 식의 기습공격은 없었다고 독일 언론은 나름대로 평가했다.

“유럽 통합 강화해야 미국서 독립 가능”

신임 독일 총리는 지난 2월 23일 조기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 “유럽은 독일의 좀 더 적극적인 리더십 행사를 기다린다. 조속한 시일 안에 유럽 통합을 강화해야 우리가 점진적으로 미국에서 정말로 독립할 수 있다”며 국내 유권자를 의식한 발언을 쏟아냈다.

기성 정당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메르츠가 이끄는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이나 연정 파트너인 사회민주당 모두 미국과의 대서양 관계를 중시한다. 이들이 보기에 미국과의 관계 강화와 유럽의 주권을 강조해 온 프랑스와의 돈독한 양국 관계는 모순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나친 대미 안보 의존을 탈피하라며 유럽에 국방비의 대규모 증액을 압박해왔다.

독일은 프랑스와 긴밀한 사전 협의를 통해 양국의 정책에 합의한 뒤 이를 유럽연합(EU)의 정책으로 만들어왔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해 EU 27개 회원국 모두 국방비를 증액하고 EU 차원에서 상호 조정해 중복 투자를 없애고 공동 구매해야 증액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약 한 달 전 메르츠 총리는 관례대로 지난달 7일 파리를 첫 해외 순방지로 선택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 방위 안보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중의 밀착, 트럼프 재집권 후 미국의 안보공약 약화 등 지정학적 위기에 맞서 공동대응을 합의하는 게 이 위원회의 일이다. 위원회의 설치는 프랑스가 지난 3월 중순 차세대 핵전력 강화를 천명한 가운데 나온 만큼 더 주목받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3월 중순 뤽세유 생소베르 공군기지를 방문해 이곳에 2035년까지 차세대 라팔 전투기 40대를 추가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차세대 라팔에는 기존보다 2배 증가한 사거리 약 960㎞의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신형 초음속 미사일이 탑재된다. 이 기지는 특히 독일 남부의 프라이부르크시에서 약 200여㎞ 떨어진 곳이다.

프랑스는 약 290개 정도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부터 프랑스 핵무기의 유럽화 논의가 시작됐으나 독일은 프랑스가 요구한 핵무기 현대화 필요 비용 분담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인프라 투자와 국방비 증액을 옥죄어 왔던 기본법(헌법)상의 균형재정 조항이 개정된 만큼 독일은 앞으로 5년간 1조 유로(약 1550조원)를 인프라 및 국방에 투자한다.

독일과 프랑스 관계는 유럽통합 과정에서 흔히 ‘기관차’, ‘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1963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엘리제 조약)으로 양국은 주요 외교 정책의 사전 협의 의무화와 청소년 교류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안보 협력은 프랑스가 지나치게 핵 주권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동안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 집권 2기와 급변한 유럽의 안보 환경이 이런 걸림돌을 빠르게 제거하고 있다.

트럼프 압박에 독-프 관계 복원

지난 2월 조기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난 올라프 숄츠 총리 시절 양국 관계는 냉랭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독일 경제는 2023년부터 2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유럽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크롱 대통령 역시 지난해 7월 조기 총선으로 의회에서 과반을 상실하면서 한 해 동안 4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그러나 프랑스 정국이 안정을 되찾고 독일에서는 정권 교체로 유럽 무대에서 리더십을 제고하려는 총리가 취임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다시 복원 중이다.

프랑스는 2027년 4~5월 대선을 치른다. 아직 마크롱의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았고 극우 국민연합의 유력 대선 주자 마린 르펜 의원의 지지율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마크롱은 2017년 집권 1기 때부터 유럽 주권 강화를 외쳐왔다. 2027년이 되면 프랑스가 대선전에 돌입해 표가 별로 안되는 유럽 정책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프랑스의 이런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독일-프랑스 기관차’가 제대로 속도를 내 유럽의 대미 안보 의존도 축소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기껏해야 1년 반 정도 남았다. 시간이 촉박해야 속도도 나는 법이다. 기관차의 질주를 지켜볼 시간이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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