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스라엘이 점령 중인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인도적 지원 허용의 의무가 있는지를 따지는 청문 절차를 28일(현지시간) 시작했다. 앞으로 5일간 진행되는 청문 절차의 시작을 연 유엔(UN)과 팔레스타인 측 대표자들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날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에서 열린 심리에서 첫 발언에 나선 엘리너 함마르셸드 UN 법률실 사무차장은 지난 3월2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긴급구호 차단을 거론하며 이스라엘이 국제법과 UN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점령국이 자국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는 유엔과 같은 공정한 인도주의 단체가 구호 활동을 수행하는 능력을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사돼야 한다”며 이스라엘이 UN 가입국으로서 지는 관련 규정과 조약을 어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함마르셸드 사무차장은 2023년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시작한 전쟁 이후 최소 295명의 UN 직원이 사망했다고도 덧붙였다.
두 번째로 발언대에 선 아마르 히자지 주네델란드 팔레스타인 대사는 지난 두 달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반입되는 식량·물·의약품·연료 등을 차단하면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가자·서안지구에서 영구 합병, 인종 청소를 벌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UN 직원이나 적신월사 등 국제구호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고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굶기고 죽이고 쫓아내는 한편, 생명을 구하려는 인도주의 단체를 표적으로 삼아 봉쇄하고 있다”며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팔레스타인 측 발언자로 나선 폴 라이클러 변호사는 “(가자지구는) 살인 현장이며, 민간인들은 끝없는 죽음의 악순환에 빠져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제네바 협약은 점령국이 구호 계획에 동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구호 계획을 촉진하도록 정하고 있다”며 “국제법과 역사의 관점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제네바 협약과 국제법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또 다른 팔레스타인 측 대리인 블린 니 그랄라이 변호사는 이스라엘 공습에 희생된 팔레스타인 아동들의 비극에 주목했다. 그는 가자지구가 “세계에서 팔다리가 잘린 아동이 가장 많은 곳”이자 “현대 역사상 가장 큰 고아 위기가 발생한 곳”이라고 했다. 그는 UN 학교 공습, 시설 폐쇄, UN 직원 이동 통제, UN 식량 창고 파괴 등 사례를 상세히 설명하며 “전례 없는 수준의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ICJ 심리는 이스라엘이 가자, 서안지구 등 점령지에서 인도적 구호를 지원·수행할 국제법적 의무가 있는지를 따지는 재판의 첫 절차다. 내달 2일까지 닷새간 미국·영국·프랑스·사우디아라비아 등 40개국과 4개 국제기구 대표들이 구두로 의견을 진술한다.
이번 청문 절차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국제사회가 내린 평가가 어떤 것인지 확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미국·헝가리 등은 오는 30일 진술이 예정돼있다. 재판부는 팔레스타인 측에 3시간, 이집트에 45분, 나머지 국가에는 30분의 구두 진술 시간을 배정했다.
서면 진술서를 낸 이스라엘은 구두 진술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기드온 사르 이스라엘 외교부 장관은 이날 ICJ 청문 절차를 두고 “유엔은 부패하고, 이스라엘에 적대적이며, 반유대주의적인 기관” “부끄러운 짓”이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벌인 혐의로 별도 사건에서 ICJ 재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