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불빛 그 한가운데서 다시 만난 희망

2024-12-28

여의도를 메운 각양각색 사람들과

광장을 채운 K팝에 맞춰 들썩이며

시민으로서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탄핵!” 외치며 다음을 꿈꾸게 됐다

“여러분, 나라가 망했어요.”

12월3일 밤, 타이베이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받은 메시지다. 나는 2주간의 대만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입국을 앞두고 있었다. 짐도 다 싸고, 침대에 기대 여행일지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몇 개의 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2024년에 계엄령이래요” “이거 가짜뉴스 아니에요?” “이다야, 한국은 큰일 났다” 읽을 틈도 없이 메시지 알림은 계속 이어졌다. 머리가 띵했다. 아니, 나 돌아가도 되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공항에 들어섰다. 진짜 나라가 뒤집혔다. 뒤늦게 소식을 따라가느라 마음이 초조했다. 다행히 국민들의 힘으로 계엄은 해제됐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토요일에 친구들과 탄핵 집회에 나가기로 약속했다.

결전의 날이 왔다. 기온은 영상 1도. 안에 내복을 껴입고, 기모 후드와 롱패딩을 입었다. 배낭에는 물과 간식, 손소독제와 방석을 챙겼다.

집회 장소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이다.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은 국회의사당역을 지나치더니 샛강역에 정차했다. 이거 어떻게 내리지?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여러 군데서 “내릴게요!”하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구로 우르르 빠져나간다. 어어어, 나도 사람들에게 떠밀려 자연스럽게 승강장에 도착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설마 다 집회에 가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진짜였다. 내리자마자 검은 롱패딩의 물결이다. 손에 LED 촛불이나 응원봉을 든 사람들도 벌써부터 보인다.

사람들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비슷하다. ‘과연 즐거운 일이란 게 있을까?’ 싶은 정도로 건조하고 지쳐있다. 하지만 오늘 사람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는다. 눈은 빛나고, 입은 굳게 다물려있다. 그리고 단호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걷는다. 아무도 터덜거리거나 휴대폰을 보며 힘없이 걷고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결연함이구나 생각했다.

1번 출구에서 친구들과 합류했다. 다들 동시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를 외쳤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긴장이 약간 풀린다. 지하철역 주변에는 우리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옆에도 무지개 깃발을 든 여성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깃발을 보고 “혹시 ○○님?”하면서 사람들이 합류한다. 아마도 X(트위터) 등에서 만난 친구들과 모여서 가는 모양이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온 사람들과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대로 그냥 따라만 가면 될 것 같다.

보통 집회나 시위는 광화문 앞 광장에서 열린다. 광화문은 탁 트여있고, 넓다. 시야를 가리는 설치물도 별로 없다. 그런데 여의도는 길 자체도 광화문에 비해 좁은 데다 가운데 가로수길까지 있다. 발을 깡총거리며 내다봐도 시위대의 전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누군가 먼저 “윤석열을? 탄핵하라!!” 외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탄핵하라!”를 외쳤다.

꽉 막힌 군중 속에서 구호만 외치며 20분이 지났다. 힘들진 않지만 답답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는지 부결됐는지, 여당 의원들이 얼마나 투표에 참여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도 전화도 안 터진다. 그런데 누가 “지금 국힘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안 들어오고 있대요!”하고 크게 외쳤다. 사람들의 탄식과 야유 소리가 들린다. “국민의힘? 돌아와라!” 누군가가 선창하자 모두가 “돌아와라!”를 외쳤다.

안 되겠다. 더 앞으로 가야겠다. 내가 앞장서고 친구들은 등 뒤에서 앞사람의 가방끈을 잡았다. “뒤에 있지?” “응!” 지금 잃어버리면 미아가 되는 거다. 한 줄로 이어진 우리는 약간의 틈을 공략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록페스티벌에서 사람들을 뚫고 전진하던 경험이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일 줄 몰랐다.

커다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자 갑자기 탁 트인 광장이 나왔다. 여기가 그 유명한 여의도 공원인가? 공원에 오자 이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아이 손을 잡은 엄마와 아빠, 가지각색의 깃발을 든 젊은 여성들, 애니메이션 캐릭터 인형을 가방에 주렁주렁 매단 남성, 노조 조끼를 입은 중년 남성들, 등산복을 입고 등산 모자를 쓴 노년 부부 등 평소에는 한 공간에서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다.

“저기 국회 돔 보인다!” 고지가 보이니 멈출 수 없다. 앞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있어 그 틈을 타 조금씩 들어가다 보니 마침내 커다란 전광판이 보인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진행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제대로 귀에 꽂힌다.

주변에는 응원봉을 든 젊은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펄럭이는 깃발들도 보인다. ‘전국까만고양이연합회’ ‘얼룩말연구회’ ‘집요정 권리운동본부’ 등. 이런, 나도 만들어올 걸 그랬다. 뭐가 좋을까, 불광천청둥오리수호단? 전국비공식도시관찰자협회? 뭐든 좋을 것 같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진다. 2016년 이화여대 시위 이후 젊은 여성들의 민중가요가 된 명곡이다. 손에 든 작은 LED 촛불을 흔들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는데 왠지 모르게 목이 멘다. 가사가 지금 상황 같아서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뒤를 돌아보니 친구들의 눈도 촉촉하다.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슬프고 화가 나지만 동시에 가슴이 벅차다. 이 많은 사람들이 뜻을 함께한다는 게 감격스럽다.

“Whip-whiplash” 에스파의 ‘위플래쉬’ 전주가 나오자 모두가 열광했다. “구호를 따라 외쳐주십시오!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 스피커 출력이 굉장하다. 귀는 터질 것 같고 박자에 맞춰 심장이 두근거린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사람들이 응원봉을 격하게 흔든다. 박자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빛이 사방에서 흔들린다. 여기가 집회 현장이 맞나? 탄핵 클럽 아닌가? 아니 탄핵 콘서트?

집회 현장의 분위기가 박근혜 탄핵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땐 광장에 신나는 음악이 없었다. K팝도 없었다. 사람들은 민중가요를 불렀고, 침착하게 촛불을 들었다. 구호를 외치지 않는 동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흥이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뚜룻뚜뚜뚜두두-뚜룻뚜뚜뚜두두 내가 제일 잘 나가-♩ ♪” 으아악! 2NE1이다! 해가 지니 점점 추워져 발도 얼었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솟구친다. 같이 온 친구들도 어느새 리듬을 타고 있다. 뭐지, 이 흥겨움은? “야, 이래도 되나 싶은데 솔직히 너무 재밌다” “미친, 나도” 배를 잡고 웃었다. 주변의 낯선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밝다. 이럴 수가, 집회가 재밌다니!

이어 거북이의 ‘빙고’, 로제의 ‘APT’, 그리고 바로 이어 윤수일의 ‘아파트’,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신해철의 ‘그대에게’, BTS의 ‘불타오르네’가 나왔다. 최고의 선곡이다!

안타깝게도 이날 탄핵소추안 표결은 무산됐다. 아마 집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면 절망했을 거다. 하지만 현장에 나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달랐다. 외롭지 않았다. 왠지 다음에는 가능할 것 같다는 희망을 느꼈다.

사실 난 그동안 집회에 별로 나간 적이 없다. 더구나 20대에는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턱도 없는 이상주의를 지향했고 무정부주의자라고 스스로 칭했다. 모든 국회의원과 정당을 혐오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쪽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보이면 ‘역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아’ 하고 욕했다. 집회 현장에서 조금만 맘에 안 드는 부분이 보이면 쉽게 실망했다. 그리고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도 잘 몰랐다. 정치에 대해 말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식있는 척하네’ 하고 경멸당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아는 사건이나 정치인을 나는 몰라서, 또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같지 않아서 망신당하거나 실망을 끼칠까 봐 두려웠다. 아예 침묵하면 누구도 실망시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참여하지 않으면, 관찰하는 상태로 있으면, 욕을 먹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나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정치에 대해 아주 잘 알 필요도 없다. 그냥 뜻이 있는 곳에 머릿수 하나 보태는 거로도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도 원하는 바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제인 구달의 책 <희망의 이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은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 모든 사람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제 이 말에 공감한다.

12월14일, 다시 여의도 집회에 참여했다. 지난주를 교훈 삼아 가방을 아주 가볍게 싸고 발등엔 핫팩을 붙였다. 응원봉도 챙겼다.

지난주보다 사람이 더 많다. 그새 익숙해진 경찰의 통제 라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어쩌다 보니 방송사 트럭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전광판도 안 보이고 매연도 심했지만 열심히 “탄핵!”을 외쳤다.

그리고 마침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배경 음악처럼 ‘다시 만난 세계’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다 말고 북받쳐 운다. 절정을 향하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탄핵까지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어두움을 밝히는 수많은 불빛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 한가운데 있다.

집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쓰레기 버릴 것 있으세요?” 한 20대 여성이 쓰레기봉지를 들고 와서 물어본다. 주변을 보니 함께 쓰레기를 줍는 여성들이 보인다. “여기 턱 있어요. 조심하세요!” “빨간불이에요. 다음에 이동하세요!” 전철역으로 가는 동안 인파를 통솔하던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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