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노년의 조용한 약탈자

2025-08-04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돈 찍기’를 시작했다. 금리는 거의 0%까지 떨어졌고, 세상엔 돈이 넘쳐났다. 세계는 새로운 경제 실험의 부작용 속에서 살게 되었다.

자산가격은 계속해서 치솟았고, 실물경기는 과열과 침체를 오가며 흐름이 불안정했다. 미국 경제 전문기자 크리스토퍼 레너드는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이라는 책에서 이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양적완화가 실물경제보다 금융시장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자산 버블과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 정치화된 중앙은행과 시장 반응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통화정책은 결국 중립성과 책임성을 약화시켰다.

그 부작용의 상당 부분은 고정 소득에 의존하는 계층에 집중된다. 특히 연금생활자와 서민이 직접적인 피해자다.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상태이고, 물가는 꾸준히 오르고 있다. 숫자로는 그대로인 연금이지만, 그것으로 꾸리는 삶은 해마다 더 팍팍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저금리와 유동성 확대는 자산가에게는 축복이지만, 은퇴자에게는 저주에 가깝다. 은행을 퇴직한 한 은퇴자는 “생활비가 은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는 얼마 전, 생계를 위해 다시 일터로 복귀했다.

국민연금공단의 ‘국민 노후보장 패널조사’에 따르면 2023년 부부 기준 최소생활비는 월 217만원, 적정생활비는 296만원이다. 10년 전인 2013년엔 각각 160만원과 225만원이었다. 10년 사이 약 32%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라면 10년 후 부부의 적정 생활비는 약 392만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은퇴 후 200만원이면 살 수 있던 시절은 지났고, 이제는 300만원이 필요하며, 머지않아 400만원이 필요해질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노후의 가장 실질적인 리스크다.

역사적으로도 통화 남발은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세계 최초의 지폐로 알려진 중국 송나라의 ‘교자(交子)’는 처음에는 일정량의 구리와 교환 가능한 실용적 화폐였지만, 발행이 쉬운 특성 탓에 결국 남발되었고, 물가 폭등과 경제 혼란으로 이어졌다. 최근 주목받는 스테이블 코인도 같은 위험을 내포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디지털 달러가 본격 유통되면, 국가의 통화량 조절 기능이 약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통화정책의 기반이 흔들리면, 예상보다 빠르고 큰 인플레이션이 닥칠 수도 있다.

이런 흐름이라면,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방법은 결국 하나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소득을 창출하고, 축적한 자산을 인플레이션 이상의 수익률로 운용하는 것이다. 노후의 평안을 원한다면,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을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한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이사·경영학(연금금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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