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켓을 잡으니 눈빛이 달라졌다. 16살 소녀는 승부사가 됐다. 아빠와 가벼운 연습 경기조차 승부욕을 불태우는 모습이 왜 탁구의 샛별로 불리는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유예린(16·화성도시공사)은 최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기자와 만나 “올해는 또래들을 상대로 세계 무대에서 우승했지만, 새해에는 언니들과 경쟁해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 언젠가는 아빠처럼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게 목표”라고 활짝 웃었다.
유예린에게 2024년은 탁구 선수로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 한국거래소 감독(56)의 외동딸인 그는 “유남규의 딸로 불리는 게 아니라 유예린의 아빠로 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탁구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땐 아예 라켓을 놓고 싶었다던 그가 지난 11월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막을 내린 2024 월드 유스 챔피언십 19세 이하(U-19)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 됐다.
유예린은 이 대회에서 세계 최강 중국을 준결승에서 만나 첫 단식과 마지막 단식을 모두 승리로 장식해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기세로 한국이 대만과 결승에서 3-1로 승리하면서 2003년 출범한 이 대회 한국 최초의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주니어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라간 것은 덤이다.
유예린은 “탁구 선수 유예린으로서 가능성을 확인한 무대”라면서 “남들은 중국을 상대로 긴장하는데, 이상하게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도 현역 시절에 ‘중국 킬러’라고 불렸다더라. 확실히 유남규의 딸이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유예린은 7살 어린 나이에 탁구에 입문했다. 아빠를 따라 취미로 30분씩 치던 탁구에 흠뻑 빠지면서 아빠와 딸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지금도 주말에는 아빠를 연습 파트너로 동원하기 일쑤다. 훈련 시간을 쪼개 만난 이날 역시 아빠와 연습 경기를 치러 2-0으로 승리한 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유예린은 “유남규의 딸이라는 가장 큰 장점은 아빠가 탁구를 쳐준다는 것”이라면서 “팀 훈련이 없는 주말에는 늘 아빠와 연습하고 있다. 그 연습이 지금까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유 감독은 “예린이는 탁구장에서도 감독이 아닌 아빠 취급”이라고 아쉬움을 내비치면서도 “본인이 탁구를 좋아하니 실력이 쑥쑥 늘고 있다”고 반겼다.
아빠와 딸은 탁구가 잘 풀릴 때면 그 누구보다 친밀하지만, 그러지 않을 땐 충돌하기도 한다. 2024년은 유독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일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유예린은 “훈련에 공을 들여도 안 풀리는 때가 있지 않느냐”면서 “방송통신고에 진학해 탁구만 친 올해 유독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아빠한테 전화해 ‘탁구를 그만두면 안 되겠냐’고 전화한 것도 여러 번이다. 아빠는 언제나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유 감독은 “예린이가 올해 실업팀 언니들과 경기를 하면서 힘들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유예린이 다시 탁구를 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집에 전시된 아빠의 메달 액자다. 현역 시절 유 감독이 올림픽(금 1개·동 3개)과 세계선수권대회(금 1개·은 1개·동 4개), 아시안게임(금 3개·은 6개·동 3개)에서 따낸 메달만 모아놓은 액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다그쳤다. 유예린은 “아빠가 메달을 20개 넘게 걸어놨어요. 올림픽에서 나도 메달을 따면 아빠의 메달 액자 옆에 걸어놓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유예린의 주변에 탁구인 자녀 라이벌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자극제다. 월드 유스 챔피언십 우승을 합작한 박가현(17·대한항공)이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동메달을 따내면서 한 발을 앞서가고 있다. 박가현은 한남대 박경수 감독의 딸이다.
유예린은 이 대회 여자 단식 64강에서 탈락했다. 유예린은 “탁구인 2세로 잘하는 친구들이 많다. 나만 뒤쳐지고 싶지는 않다. 완벽주의자인 아빠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고 600일 넘게 남들 몰래 훈련을 더 했다고 한다. 나도 아빠만큼 훈련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예린은 그 결과가 내년 1월 충북 제천에서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나오길 바라고 있다. 국가대표 상비군인 그는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대를 이어 국가대표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아빠는 중학생으로 태극마크를 달았죠. 아빠보다는 조금 늦어도 상관없어요. 대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싶어요. 아빠의 메달 액자 옆에 저도 메달을 늘려간다면 유남규의 딸이 아니라 아빠가 ‘유예린 아빠’로 불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