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의 고전 <서경(書經)>에 “천시자아민시 천청자아민청(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이라는 글귀가 있다. 하늘(天)이 보는(視) 것은 우리(我) 평범한 민중(民)이 보는 것에서 비롯(自)하고, 하늘이 듣는(聽) 것도 민중이 듣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바로 그 얘기다.
라틴어 글귀 “복스 포풀리, 복스 데이(Vox populi, Vox dei)”도 민중(populi)의 목소리(vox)가 곧 신(dei)의 목소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보고 듣는 것은 몸 밖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 모두 오래전부터 평범한 이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하늘과 신에 견줄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랜시스 골턴이 1907년 ‘네이처’에 게재한 논문의 제목이 ‘Vox Populi’(민중의 목소리)다. 골턴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우생학자로 지탄받아 마땅한 나쁜 과학자지만 통계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여럿 남겼다. 지금도 널리 이용되는 ‘선형 회귀분석’을 제안했고, 키 작은 부모에게서 어쩌다 큰 키의 아들이 태어나면 손자의 키는 아들보다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예로 대표되는 ‘평균으로의 회귀’를 발견했으며, 표본을 대표하는 값으로 널리 쓰이는 ‘중앙값(median)’을 창안했다.
2025년 우리나라 4인 가구의 약 600만원 중위소득이 바로 중앙값이다. 데이터를 크기 순서로 정렬하고 한가운데 값을 고른 것이다. 빌 게이츠가 탄 비행기에서 승객의 평균 재산을 구하면 빌 게이츠 한 명 때문에 엄청나게 큰 액수가 얻어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타더라도 승객 재산의 중앙값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중앙값은 예외적인 데이터로 전체가 그릇되게 대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용한 통계량이다.
골턴은 논문에서 영국의 한 가축시장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한다. 티켓을 구매한 800명에게 황소를 보여주고 눈짐작으로 예측한 몸무게를 각자 적어내게 했다. 황소의 실제 몸무게에 가장 가까운 값을 적어낸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행사다. 황소의 실제 몸무게는 1198파운드였는데, 사람들이 써낸 숫자를 이용해 구한 평균값은 1197파운드였다. 흥미롭게도 골턴은 자신의 논문에서 평균값이 아니라 자신이 창안한 중앙값 1207파운드를 소개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같다. 많은 사람이 최선을 다해 예측한 결과를 모아 평균값이나 중앙값을 구하면 실제의 참값과 상당히 가까운 값이 얻어진다.
이런 현상을 대중의 지혜(wisdom of crowds), 혹은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라고 부른다.
집단지성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도 중요하다. 참여한 사람들이 주어진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너무 큰 영향을 받지 않아 각자가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집단’은 집단농장이나 집단사고처럼 강요된 획일성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때가 많다. 위에서 소개한 집단지성 발현에 중요한 다양성의 의미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나는 이전에 집단지성을 ‘함께 지성’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관심 있는 여럿의 독립적인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예가 있다. 주식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한 기업의 미래 가치를 현재 주가보다 높게 평가하면 매수자가 늘어 주가가 오르고, 미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 더 떨어지기 전에 파는 것이 유리해서 매도자가 늘어 주가가 내려간다. 평상시 주식시장은 참여자의 함께 지성을 이용해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일종의 계산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럿의 의견을 모아 정치 지도자를 뽑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는 함께 지성의 대표적인 예다. 누구나 똑같이 한 표의 권리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행사하는 보통 선거와 비밀 선거는 함께 지성이 옳게 발현되기 위해 중요한 다양성과 독립성에 도움을 준다. 우리는 선거로 함께 지성을 드러낸다. 결과가 내 생각과 달랐어도 우리 국민 모두의 서로 다른 마음이 모인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이자. 당선자와 집권 정당이 펼치는 이후의 정책과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함께 지성을 모아 집권 정당을 바꿀 일이다. 우리 모두 매의 눈으로 당선 이후를 관심 갖고 지켜볼 일이다. 선거는 끝이 아니다.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