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한국에서 배임죄로 기소되는 인원이 일본의 30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개정 상법이 시행된 가운데, 배임죄 적용 범위를 축소하지 않으면 기업 의사결정에 중대한 지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자, 더불어민주당도 배임죄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일 발간한 ‘기업 혁신 및 투자 촉진을 위한 배임죄 제도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에서 지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배임죄로 기소된 인원을 비교해보니, 한국이 일본의 31.1배 수준으로 많았다. 일본은 연평균 31명이 배임죄로 기소됐으나 한국은 965명에 달했다. 일본 인구(1억2000만명)가 한국의 2배가 넘는데도 이 정도 차이가 나, 한국에서 배임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분석이다.
또 한국에서 최근 10년간 배임죄 기소율은 14.8%로, 전체 사건 평균 기소율(39.1%)보다 훨씬 낮았다. 경총은 “배임죄 고소·고발이 과도하게 남용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현행 배임죄는 구성 요건이 광범위하고 모호해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하고, 배임 행위 요건도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모호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재계에서는 배임죄의 처벌 수준이 과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달 ‘배임죄 제도 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는 주요국 중 유일하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을 통해 배임죄를 가중처벌하는데, 이로 인해 주요국 대비 형량이 매우 높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특경법상 배임을 통한 이득액이 5억원 이상인 경우 강도·상해치사와 동일한 ‘3년 이상 징역’으로 처벌하고, 50억원 이상인 경우엔 살인죄와 유사한 형량인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처벌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중 처벌되는 이득액 기준은 1990년 개정 당시 ‘5억·50억원’으로 상향됐으나, 이후 35년 동안 그대로다.

재계는 오랫동안 배임죄 폐지 또는 완화를 요구해왔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의 경영자들은 신속한 판단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배임죄 부담이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최근에는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까지 확대돼, 무분별한 고소·고발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배임죄 개선만으로 상법 개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배임죄를 완화하더라도 소액주주들이 이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 남발 우려는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기업들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상법에 명문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근거로 주의 의무를 다해 경영상 결정을 내린 경우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의무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원칙을 법에 못박자는 것이다. 미국·영국·일본 등은 판례로 운용하고 있고, 독일은 2005년 주식법에 명시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개정 상법 영향으로 기업 현장이 혼란스러운데, 대규모 투자 등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신속히 내릴 수 있도록 국회가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잇따른 ‘기업 옥죄기’ 법 통과에 민주당도 진화에 나섰다. 이날 민주당은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해 배임죄 개선과 최고경영자(CEO) 형사처벌 리스크 완화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TF는 조만간 재계와의 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수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TF 발족식에서 “배임죄의 경우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경영 판단마저 검찰의 수사·기소 남용으로 기업 활동을 위축시켜 왔다”라며 “새로운 시대에 맞게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발족식에 앞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선 “기본적으로 배임죄는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