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휘공초(李秉輝供招)』
1894년 10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 3차에 걸친 이병휘(李秉輝)의 신문기록이다. 이병휘와 혐의자 허엽 및 주사 민규정 등과의 대질신문, 허엽 단독 신문도 첨부되어 있다. 서울 출신으로 북한산성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던 정3품 무관직인 관성장(管城將)을 하고 있던 이병휘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동학농민군에게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과 손을 잡고 여러 명의 밀사를 각처의 농민군들에게 파견하였다. 이 『이병휘공초』는 흥선대원군과 동학농민군과의 관계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의 동향과 농민군의 지향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병휘공초』에 따르면 호서에 있던 대원군의 부하 정인덕이 박동진ㆍ박세강 등에게 제안한 작전 구상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북접 계열 인사인 박동진은 공주에서 임기준ㆍ서장옥과, 남접 계열 박세강은 전봉준ㆍ송희옥과 함께 농민군 동원을 기획하였다. 당시 박동진은 이준용의 지휘를 받았고 박세강은 대원군의 분부를 따르고 있었다. 일본공사관에 의하면 박세강과 박동진은 원래 동학당의 수괴로서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는데 8월 하순 대원군은 두 사람의 죄를 사면하고 박세강을 내무아문 주사, 박동진을 의정부 주사로 임명하여 선유사 정경원과 함께 충청도에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충청도 농민군을 규합하여 갑오개화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 탈취를 기도하였다.

일본 측에서도 특히 10월 7일 이병휘의 두 번째 신문을 주목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동학당 사건에 대한 회심(會審) 전말 상세 보고 : 이병휘가 제출한 시말서」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서울에 들여보낸 동학당은 종로에 모여 ‘만인소청(萬人疏廳)’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보내 각국 공관에 조회한다. 그리고 통위영ㆍ용호영ㆍ총어영ㆍ호분위 등을 파견하여 궁궐을 파수케 하고 대중을 지휘하여 궁궐에 들어가 주상을 상왕으로 받들고 중전과 왕세자를 폐하며 이준용을 맞이하여 보위에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개화당을 모두 살해하고 ‘자주지정(自主之政)’을 세우고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여 청국에 알려 후일의 시비를 방지토록 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출동한다면 청국군을 기다려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일부 호서농민군 세력은 이준용ㆍ대원군과 연결하여 왕권을 뒤엎으려는 기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ㆍ동학농민군ㆍ조선 정부 모두 평양 전투의 승패 여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박세강의 체포로 대원군 측은 남접 주력인 전봉준과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후 주로 북접 호서농민군과 제휴하여 왕권을 뒤엎으려고 기도하였다. 또한 민영준과는 달리 사전에 청병 파병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청병 스스로 출병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때 대원군 측은 허엽이 추천한 청주의 이용구를 만인소의 우두머리로 내세웠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이자 정치인인 정교(鄭喬)도 대원군 지시로 호서수재(湖西守宰)와 농민군은 합력 북상하여 청국군과 더불어 남북으로 협공하여 일본군을 타파코자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준용공초(李埈鎔供招)』
1895년 3월 25일부터 4월 14일까지 걸쳐 진행된 법부협판 김학우 피살 사건과 이준용 등의 ‘모반사건’ 관련 피의자들의 신문기록이다. 이준용(李埈鎔)은 국왕 고종의 형 이재면의 큰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종손자이다.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잠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대원군의 후견으로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의 힘을 빌려 평양에 주둔한 청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 전복을 꾀하였다. 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원군은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준용은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인 김학우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파 세력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특별 석방되었다.
이 공초는 이준용 외에 관련 및 혐의자 서병선ㆍ임진수ㆍ정조원ㆍ윤진구ㆍ장덕현ㆍ전동석ㆍ김내오ㆍ손이용ㆍ박준양ㆍ이태용ㆍ고종주 등 12명을 총 26차례에 걸쳐 취조하고 그들이 진술한 내용이다. 먼저 법무아문에서는 김학우 피살 사건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을 지적하고 있다.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등의 심문에서 이준용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준용처럼 4차례에 걸친 경우, 박준양과 이태용처럼 3차례, 임진수ㆍ전동석ㆍ고종주처럼 2차례도 있었고, 서병선 등 나머지 사람들은 1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이준용공초』의 또 하나의 중요 포인트는 이준용과 동학농민군 관련 문제이다. 이 사건은 대원군 세력이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추동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갑오 개화파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를 추궁하고자 한 재판으로 이 공초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와 관련하여 대원군과의 관련성 등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임진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에게 각국 공관과 각국 공사에게 급히 해야 할 일을 함께 토론하게 하고 서양 나라의 통용되는 관례에 의하여 별도로 상하의원(上下議院)의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글로 작성하여 동학농민군에게 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정인덕도 일본과 더불어 상하의원을 만들어 공동의 정치를 이룬다면, 동양의 형세도 구미와 균형을 다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또 다른 공모자 고종주는 1차 진술에서 ‘유신설(維新說)’을 주장하면서 이는 갑오년 6월 21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국왕의 형인 이재면에게 통지하였다. 여기서 6월 21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일로 일본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운현궁 세력은 경복궁 점령 후 일본군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를 기도하는 방안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2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국권을 모두 운현궁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결국 흥선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이준용ㆍ이재면 등 대원군 세력의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 기도로 이해된다. 이준용은 전라ㆍ충청ㆍ경상도 등 삼남의 농민군을 모두 동원하고 이들과 합세해서 쿠데타를 진행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고종주는 ‘동비(東匪; 동학농민군)’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반면 3차 진술에서 고종주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말하고 청국군과 연합전선을 통한 일본군 격퇴를 주장하는 등 그간의 입장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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