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 칼럼] '민간 외교' 최전선에 선 재계 총수들

2025-04-02

[서울=뉴스핌] 김양섭 산업부장 = 글로벌 통상 환경이 다시 긴장감 속에 재편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정부의 부재 속에 민간, 특히 재계 총수들이 외교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중국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동했다. 애플, 퀄컴, BMW, 벤츠, 화이자 등 세계 유력 기업인들과 나란히 선 자리에 이 회장은 사실상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섰다. 샤오미, BYD 등 중국 주요 기업과의 릴레이 회동을 통해 반도체 및 전장 부문의 협력을 모색한 그의 일정은, 중국 시장에 대한 복잡한 이해관계와 전략적 긴장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같은 시기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미국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주했다. 발표한 내용은 210억 달러, 한화로 약 31조 원에 달하는 대미 투자 계획이었다. 제철소부터 자동차 생산 공장, 공급망 전반에 걸친 대규모 현지화 방안이 담겼다. 백악관이라는 최고의 외교 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한 인물은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 기업의 총수였다.

SK의 최태원 회장은 미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에너지와 인공지능(AI) 인프라 협력을 주도했고, LG의 구광모 회장은 인도와 중동에서 미래 전략을 구체화했다. 그들은 지금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련의 행보는 철저히 개별 기업들의 '각자도생' 결과물이었다. 외교 당국의 조율이나 전략적 틀은 보이지 않았다. 공동의 전략 아래 움직이는 '팀'이 아니라, 각기 다른 위기 인식을 바탕으로 글로벌 무대에 나선 독립적 대응이었다. 정부는 이 흐름에서 조율자도, 지원자도 아니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가운데 외교 라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고위급 외교 채널은 중단되다시피 했다. 산업부 장관이 수차례 미국을 방문했지만 트럼프를 만나지 못했다. 반면 정의선 회장은 백악관 회견장에서 트럼프와 함께 섰다.

정부도 이제서야 늦은 대응에 나섰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날 4대 그룹 총수들과 함께 '경제안보전략 TF' 첫 회의를 개최했다. 비록 한 발 늦은 행보지만, 민과 관이 처음으로 전략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는 점에서 상징성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회의가 단발성에 그친다면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실효성 있는 전략 조율과 지속 가능한 이행 체계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을 행사한 것은 기업 경영의 복잡성과 시장의 불확실성을 인식한 신호로 읽힌다. 그러나 외교와 통상이라는 본류에서, 정부의 존재감은 여전히 희박하다. 재계 총수들의 민간 외교는 찬사보다 구조적 반성을 요구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기업은 이미 바쁘게 뛰고 있다. 이제 국가가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다.

ssup825@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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