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더중플 - 이재명, 그 결정적 순간들
제가 하는 모든 일에는 우리의 삶, 우리 서민들의 삶과 이재명의 참혹한 삶이 투영돼 있습니다. (2022년 1월 24일, 성남 상대원시장 유세 연설)

스스로 참혹했다고 표현한 이재명 대통령의 삶은 대관절 어떤 것이었을까요? 궁금증에서 출발해 찬찬히 그의 삶을 훑어본 기자는 그 과정에서 아찔함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참혹했을 뿐 아니라 아슬아슬했습니다. 하나라도 잘못 넘거나 넘는 데 실패했다면 지금의 이 대통령은 없었을지도 모를 고비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대선주자 탐구’를 통해 그의 인생을 한 차례 소개했던 ‘더중앙플러스’가 그의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 말 그대로 ‘결정적 순간’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려는 이유입니다. 그 결정적 순간들은 어쩌면 그의 미래, 그리고 국가의 미래까지 점쳐볼 수 있는 귀한 사료이자 토대가 될 것입니다. 그 ‘결정적 순간’들이 이 대통령의 향후 정책 결정과 국가 경영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으로 여러 번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죠.
제5회 악전고투, 파란만장 사시 도전기
재명아 어때? 잘 될 거 같아?
1985년 가을 중앙대 법대 4학년생 이재명은 표정이 밝았다. 사법고시 2차 시험 결과가 낙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낙관적이어야만 했다. 어느덧 졸업반이 된 그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장학생으로 중앙대에 진학한 그였지만 졸업 이후에는 장학금이 끊긴다. 돈 나올 구멍이 사라지면 고시 공부를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하면 국가의 부름에 응해 입대해야 했다. 한마디로 이번에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다행히도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큰 강적이었던 민법 답안지도 만족스럽게 작성한 그였다. 그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교수들까지 그의 합격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재명은 자신감과 긴장감이 절반씩 섞인 심리 상태로, 결과를 확인했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 심장이 추락하는 듯했다. 그는 명단을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낙방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모르는 문제가 없었고, 자신 있게 또박또박 답안을 작성했다고 확신했던 그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아노미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이유를 확인했다. 알고 보니 ‘상법’ 과목에서 과락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급히 주변을 수소문했다.
되돌아온 건 한숨 섞인 부정의 답이었다.
재명아…. 그거 아니었어….

이재명,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그가 처음부터 사시에 뜻을 둔 건 아니었다.
법대를 선택했지만, 그건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단과대학이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법대 안에 법학과와 행정학과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재명이 장학생으로 법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친지들은 그를 이미 판검사와 동렬에 올려놓았다. 사법시험에 응시하는 건 정해진 수순처럼 인식됐다. 두 학과 중 법학과를 선택한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된 그 앞길을 걷기 직전 스스로 다짐했다. 그가 입학 직전 작성한 일기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사법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그가 1차 시험에 합격한 건 1984년 5월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평균 90점 이상이라는 굉장히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2차 시험은 만만치 않았다.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국민윤리 등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시험 범위’가 그를 내리눌렀다.
일단 1차 시험에 합격한 1984년에는 2차 시험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1차 시험에 주력하느라 2차 시험 준비는 한 과목밖에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험 삼아 응시했지만, 결과는 역시 낙방이었다.
대학 졸업반, 배수진을 치다
진검승부는 이듬해였다. 대학교 4학년이 된 1985년, 그는 배수진을 쳤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월 20만원씩의 특대 장학금은 원래 3학년까지만 지급되는 것이었다. 4학년이 되면 장학금은 사라진다. 천만다행히도 학교에서 4학년이 된 그에게도 월 10만원씩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한시름 돌렸다. 하지만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졸업 이후에도 학교에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해에 낙방하면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입대는 사실상 사시와의 이별을 의미했다. 군대에서 3년을 보내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신림동 ‘관악고시원’에 들어갔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더중앙플러스-대통령 이재명, 그의 삶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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