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를 삼면으로 둘러싼 객석을 보는 순간 재판정의 배심원석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대 중앙에 놓인 것은 붉은 카펫 위에 차려진 화려한 만찬 테이블. 법정도 연회장도 아닌 이 기묘한 광경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심판 혹은 축제, 처형 혹은 환대가 뒤섞인 블랙코미디임을 예고한다.
지난해 초연으로 호평받은 연극 ‘트랩’이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막을 올린 연극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서울시극단의 올해 마지막 레퍼토리다.

작품은 자수성가한 섬유 회사 판매 총책인 알프레도 트랍스(박건형)가 자동차 고장으로 머물게 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낼 한 저택을 방문하며 시작한다. 이곳에는 은퇴한 판사(남명렬)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대신 자신의 유희에 어울려줄 것을 제안한다. 그 유희란 전직 판사와 전직 검사, 전직 변호사, 심지어 전직 사형집행인까지 참여하는 모의 재판이다. 은퇴한 노인들이 저녁마다 벌이는 법정 놀이에 피고인(죄인)으로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트랍스는 자신이 법을 어긴 적이 없다며 자신 있게 피고인 역할을 맡지만 죄와 벌과 법에 통달한 관록 있는 법조인들이 펼치는 ‘죄의 향연’에 점점 휘말린다.
휴식 없이 1시간 30분을 몰아치는 연극은 술을 마실수록 술자리가 무르익듯 죄가 더해질수록 재판과 만찬의 열기가 고조되는 독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고 믿어왔던 트랍스가 전직 검사의 노련한 추궁 속에서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죄와 악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최고급 요리와 값비싼 와인이 식탁에 오른다. 먹고 마시고 환호하는 축제에 흠뻑 빠진 트랍스는 죄가 더해질 때마다 오히려 자신의 평범한 삶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듯한 기이한 황홀경마저 경험한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린 듯한 떠들썩한 ‘죄와 벌의 유희’가 끝난 자리에는 심오한 질문들이 겹겹이 남는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이란 결국 타인의 실패에 올라서야 완성되는 것인가. 범죄가 아닌 부도덕을 법의 잣대로 심판할 수 있는가. 부도덕도 죄라면 죄를 짓지 않는 삶이란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자리에 앉은 우리는 결백한가.


이 우스꽝스럽고 끔찍한 블랙코미디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멋진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퍼포먼스로 무대에 등장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트랍스 역의 박건형부터 남명렬, 강신구, 김신기, 손성호, 이승우 등 관록의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 배틀’은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핵심적인 요소다. 자신만만한 얼굴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 박건형의 캐스팅은 특히 찰떡이다. 만찬과 재판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변해가는 그의 표정은 극의 제목처럼 잘못된 ‘함정’에 빠진 자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식전주로 시작해 전채와 메인, 디저트까지 고급 코스 요리가 줄줄이 서빙되는 만찬의 흐름 속에서 배우들이 실제 고기를 썰고 잔을 부딪치며 연기를 이어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현장감을 살려 몰입도를 높이는 장치이지만 보다 보면 배가 고파질 수 있으니 반드시 식사를 한 뒤에 공연을 즐기는 편이 좋겠다. 무대 양편의 객석은 배우들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자리이지만 장면에 따라 시야가 다소 차단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연은 3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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