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이 처음 내원하셨을 때 PET-CT(양전자방출 단층촬영) 사진이고 오른쪽이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암세포의 대사반응이 전혀 없어요. 종양의 대사 활성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와 더 이상 암세포가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올 4월 삼성창원병원 2층 호흡기내과 외래진료실. 주치의인 정재완 교수의 호출을 받고 8층 병동에서 내려온 강모(47·남) 씨는 모니터 화면 속 영상을 재차 확인했다. 강 씨는 뇌와 전신 뼈 전이를 동반한 폐암 환자로 입원 후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를 처방받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정 교수는 "표적항암제 처방 6개월 시점에 찍은 머리 자기공명영상(MRI)과 흉부 컴퓨터단층촬영(CT) 모두에서 병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며 "치료 반응이 너무 좋아 계획에 없던 PET-CT를 찍었는데 검사 결과가 뜨자마자 곧바로 환자에게 결과를 알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강 씨에게 렉라자 복용을 처방한지 6개월 만에 나타난 변화였다. CT·MRI·PET 검사상 모든 병변이 소실됐으니 호흡기내과 전문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문용어로는 '영상학적·대사학적 완전관해(암세포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이렇게 빠르고 완벽하게 치료반응을 보인 사례는 제 경험상 처음이었다"며 "렉라자의 효과가 우수하다보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치료 시작 3~6개월 사이에 반응을 보이지만 아직까지 완전관해에 도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설명했다. 수술 후 조직검사에서 ‘병리학적 완전관해’를 확인한 사례가 최근 학계에 보고됐을 정도로 완전관해는 흔치 않다.
◇ 호흡기 증상 전혀 없는데 ‘폐암 4기’ 진단 날벼락…흡연력 없어도 정기검진 필수
강씨는 작년 10월 구역·구토를 동반할 정도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병원을 찾았다.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돼 삼성창원병원에 의뢰됐고 정밀검사를 통해 '비소세포폐암의 일종인 선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이미 폐를 싸고 있는 흉막을 넘어 뇌와 전신 20곳 이상에 전이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강씨는 "두통과 함께 심한 구역질과 구토 증세가 나타나 가만히 앉아있지 못할 정도였다"면서도 "폐나 호흡기 관련 증상은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흡연 경험은 물론 가족력도 없었고, 1~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아왔기 때문에 폐암 진단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폐암은 대부분 초기 증상이 거의 없다.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태인 4기에 진단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에겐 더욱 가혹하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가 발간한 보고서(GLOBOCAN 2020)에 따르면 폐암 신규 환자의 59.6%가 아시아에서 진단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표적항암제가 다수 개발돼 있는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EGFR) 돌연변이 발생률이 40~55%로 백인(15~25%)에 비해 2~3배가량 높다는 점이다. EGFR 단일 유전자 변이만 확인하는 검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7~10일 정도 소요된다. 정 교수는 "신경학적 이상 증상이 동반될 가능성 때문에 치료 시작 자체가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다른 진료과와 긴밀히 상의한 끝에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 방사선 치료를 먼저 시행했다"고 말했다. 방사선 치료와 스테로이드 치료를 병행하며 두통 증상이 상당히 호전됐고 조직검사 결과 EGFR 엑손 19 결손 변이가 확인됐다. 이는 EGFR 돌연변이 중 엑손 21 치환(L858R)과 함께 가장 흔한 유형이다.
◇ EGFR 유전자 변이 확인 땐 ‘표적항암제’ 투여…“뇌전이 환자에도 효과”
정 교수에 따르면 렉라자와 같은 3세대 EGFR 표적항암제는 EGFR 엑손 19 결손 변이에 대해 우수한 치료 효과를 보인다. 기존 1·2세대 약물과 달리 뇌혈관장벽(BBB) 투과율이 우수해 뇌전이 환자에게도 효과적인 약제로 평가받고 있다. 정 교수는 "2년 전만 해도 1세대 약제를 먼저 처방한 후에도 암이 진행되면 3세대 약제를 처방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국내 기업이 개발한 3세대 약제가 EGFR 엑손 19 결손 또는 엑손 21 치환 변이가 확인된 비소세포폐암의 1차 치료제로 허가됨에 따라 뇌전이를 동반한 환자들도 치료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 직후 병원 공급이 시작돼 신속한 처방이 이뤄질 수 있었던 건 국산 신약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개발사인 유한양행(000100)이 “급여 처방이 가능해질 때까지 렉라자를 무상 지원하겠다”고 나선 덕분에 비용 부담 없이 치료 혜택을 본 환자들도 상당하다.

강씨는 “약물 복용을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암세포가 육안으로도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니 꿈만 같았다”며 “그 때의 PET 검사 사진은 지금도 스마트폰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이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4기 폐암은 병기상 ‘완치’ 판정이 불가능한 만큼, 3개월 마다 면밀히 경과를 관찰해야 한다. 정 교수는 “폐암 치료 성과가 지속적으로 향상되면서 환자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게 됐다"며 "암환자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