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데서 떨면서 기다리는 거 잘함. 반짝이고 빛나는 걸 갖고 있음. 목소리가 큼. 정보가 빠르고 규모 파악에 능함.’
최근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K팝 팬들이 시위에 최적화된 이유’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이다. 우스개 같아 보이지만 사실 하나씩 따져보면 틀린 게 없다. 시위의 주 참여자부터 시위에서 불린 노래, 쓰인 소품까지, 이번 탄핵 집회는 2030 여성이 중심이 된 K팝 팬덤 문화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K팝 팬덤의 주 소비층은 2030 여성이다. 이번 탄핵 집회를 아우르는 단어가 ‘K팝’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집회의 주요 참가자가 2030 여성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K팝 팬덤은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12·3 비상계엄 사태’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광장으로 달려 나왔다.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찬 바닥에 앉아 K팝을 듣고 부르며 국회의 1·2차 탄핵 표결을 기다렸다. 핫팩과 보조배터리, 물과 간식 등 추운 날 야외 시위에 필요한 물품들은 사실 K팝 팬들이 콘서트장에 갈 때 챙기는 물건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K팝 팬덤의 필수품인 ‘반짝이고 빛나는’ 응원봉은 이번 탄핵 시위의 상징이 됐다.
K팝 팬덤과 함께 K팝도 광장으로 나왔다.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순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집회 현장에서 제일 처음 울려퍼진 노래는 민중가요가 아닌 2세대 K팝 아이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였다. 결과 발표 때 잠시 조용해졌던 현장은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이라는 ‘다만세’의 가사와 함께 다시 떠들썩해졌다.
과거처럼 ‘세대를 아우르는 히트곡’이 존재하기 어려운 요즘, K팝이 그나마 가장 다양한 연령대에게 소구되는 음악이 됐다는 점도 새로운 집회 문화가 만들어진 원인으로 보인다. 이번 시위에서 특히 많이 쓰인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2009), G드래곤의 ‘삐딱하게’(2013)는 모두 2000년대 중후반~2010년 대 초까지 인기를 끌었던 곡들로, 현 2030 세대가 학창시절 즐겼던 노래들이다. 최신곡 중에서는 DAY6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2019),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2021) ‘수퍼노바’(2024) ‘위플래시’(2024) 등 올해 음원 차트 상위권을 지키며 팬덤을 넘어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곡들이 주로 선택됐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사실 과거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이번 집회 현장에서도 많이 불린 윤수일의 ‘아파트’도 그렇게 볼 수 있다”며 “요즘엔 다 같이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는 거의 없는데, 집회의 주축이 2030 여성이라면 그들이 가장 잘 부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노래는 K팝”이라고 말했다.
K팝 팬덤 특유의 조직적인 문화도 시위에 그대로 반영됐다. K팝 팬덤은 새벽부터 이루어지는 ‘사전녹화’ 대기·콘서트장 줄서기 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체력적으로 부담이 돼도 마다하지 않는다. ‘투표 불성립’ 처리된 1차 탄핵 표결 후에도 마지막까지 응원봉을 들고 국회 앞을 지키는 2030여성들의 모습을 두고 마치 ‘최애’의 퇴근길을 지키는 모습이 연상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김 평론가는 “2030은 팬덤 활동을 통해 이미 집단으로서의 움직임, 사회적 행동을 경험한 세대”라며 “그런 경험이 사회 문제가 발생하자 가장 먼저 반응해서 나가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팬덤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는 정치적 발언을 유독 조심스러워하는 국내 가수, 배우들에게도 목소리를 낼 용기를 줬다. 그룹 아이즈원 멤버 이채연은 팬들과의 소통 플랫폼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란 어떤 위치냐”며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정치) 언급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연예인이니까 목소리 내는 거다. 우리 더 나은 세상에서 살자”고 말했다. 아이돌 멤버로서는 더욱 드문 ‘소신 발언’에 응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가수 아이유는 탄핵 2차 표결 전날 서울 여의도 인근의 식당, 빵집에 집회에 가는 팬들이 먹을 수 있도록 빵과 국밥, 떡, 음료 수백 잔을 선결제했다. 소속사와 전속계약 분쟁 중인 그룹 뉴진스도 ‘버니즈(뉴진스 팬덤)와 K팝 팬 여러분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며 김밥, 냉면, 삼계탕 등을 선결제했다.
배우 이동욱은 탄핵 가결 직후 팬 소통 플랫폼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노래를 공유하며 “봄이 한 발 가까워진 듯”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