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이라 붙인 껍질…일단 까봐야죠”

2024-10-14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나의 장애는

운동선수가 찬 ‘모래주머니’ 같아

손이 기억할 때까지 연습, 또 연습

국제체스대회 국가대표로도 참가

답이 하나뿐이라 생각하는 사회

무너지지 않는 비결은 도전입니다

“악보 한 소절을 외우고, 손가락이 기억할 때까지 연습합니다. 그 뒤 다음 소절을 같은 방식으로 외웁니다. 그렇게 끝 소절까지 연습한 뒤에야 곡 하나를 연주할 수 있어요. 점자 악보를 손으로 훑으면서 동시에 건반을 칠 수는 없거든요. 손은 두 개뿐이니까요.”

최근 발간된 <나는 꿈을 코딩합니다>의 저자 서인호씨(28)는 구글의 한국인 개발자다. 시각장애인, 그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 ‘전맹’ 장애인이다. 모니터 글자를 볼 수 없는 그가 세계 인재들과 경쟁해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 개발자가 된 비결을 지난 10일 물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를 배우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줬다.

“뭘 하든 비장애인과 달리 시작부터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숙련도와 디테일에서 비장애인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장애는 제게 운동선수가 훈련할 때 차는 ‘모래주머니’ 같은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원래 눈이 보였다. 그러다 다섯 살 때 녹내장 합병증으로 한쪽 눈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3년 뒤 다른 쪽 눈의 시력마저 잃었다. “당시엔 어려서 ‘더 이상 게임을 못하게 돼 속상한 정도’였다”며 “그러나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차츰 깨닫게 됐다”고 했다.

무너지지 않은 비결을 물었다. 그는 “껍질에 ‘불가능’이라고 쓰여 있어도 일단 다 까보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제 주위는 순식간에 ‘불가능’ 딱지가 붙은 것들로 가득 찼어요. 포기하거나 ‘불가능’에 도전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어요.”

그가 도전한 ‘불가능’ 중에는 ‘시력을 되찾는 것’도 있었다.

“책을 보고 인터넷도 뒤지고, 갖은 수단을 다 써봤어요. 그러나 실패했죠. 당시 의사 선생님은 제게 ‘불가능한 목표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가능한 것을 찾아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이 조언을 반만 들었다. 시력을 되찾는 건 포기했지만 ‘불가능’에 대한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엔 전국 어린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입상했고, 2015년에는 국제체스대회 ‘Seoul IBSA World Game’에 국가대표로 나갔다. 대학 코딩 수업에서 유일한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시각장애를 ‘모래주머니’ 삼아, 수강생 300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2017년엔 9개월간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갔다. 홀로 미국 각지를 여행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노름’도 해보고, ‘카 레이싱’도 경험했다. “영어가 비장애인보다 오히려 빨리 늘었어요. 저는 메뉴판을 볼 수가 없으니 점원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설명을 들어야 했거든요. 하루에도 수없이 말하고 듣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던 셈이죠(웃음).”

이런 성과와 경험은 2021년 그가 구글 인턴십 기회를 따낸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1년 만에 정직원이 됐다.

그는 모니터 화면을 보지 못한다. 대신 글자를 음성으로 들려주는 장치(스크린 리더)를 통해 모니터를 듣는다. 개발 중인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하면 수십에서 수백 줄에 달하는 코드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업무 도중 필요한 그래프 같은 시각자료는 동료들이 말로 설명해줘야 한다. 비장애인 직원보다 시간과 도움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도 회사는 그를 선택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라는 마인드였어요. 반면 한국에선 저는 저작권법 전문가가 돼야 했습니다. 교재를 점자본으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하면 ‘저작권법 위반 소지’ 등을 이유로 들면서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그는 JP모건 런던, 페이스북, 애플 저팬 등에서도 취업 인터뷰 제의를 받았다. 그의 능력을 먼저 알아본 건 한국이 아닌 외국 회사들이었다. 그는 다양성과 유연성이 사회 구성원의 역량을 최대로 활용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고 했다. “답이 한 개뿐인 사회에 비해, 답이 여러 개일 수 있는 사회에 ‘가능’한 것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눈이 안 보이니 업무는 불가능하다’ ‘최대 다수(비장애인)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장애인)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만이 정답인 곳에선 제가 설 곳이 마땅치 않아요. 비단 장애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벌, 출신 등을 이유로 능력을 펼칠 기회가 제한되는 일부 사례들도 ‘답이 하나뿐인 사회’의 단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답이 하나뿐인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오히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회일수록 ‘불가능’이라고 쓰인 껍질을 까보면 ‘가능’일 때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걸 확인하려면 일단 까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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