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기술이 만났을 때, 비로소 새 시장 열려
1980년대 일본 카메라 회사 미놀타에 다니던 우에다 히로시는 필름 카메라를 고정해 혼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셀카봉을 발명했다. 카메라 고정부와 길이 조절 막대, 스위치까지 달린 현재의 셀카봉과 같은 구조였다. 셀카나 셀피라는 표현조차 없던 시대, 왜 혼자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셀카봉은 조용히 사라졌다. 2010년대 초반에 들어서서야 전 세계에서 셀카봉이 대유행했지만 2005년 특허 권리가 소멸한 뒤였다.
이처럼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에 사라졌다가 뒤늦게 성공한 사례는 자동차 업계에 유독 많다. 엔진, 전기, 전자, 소재, 디자인 등 다양한 기술 분야가 결합된 데다 늘 사용하는 실용적인 제품이라 혁신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제품은 실패하더라도 기술은 자산으로 남는다. 제조사들이 당장 만들지는 않지만 미래 비전를 보여주는 콘셉트카를 꾸준히 내놓는 것도 그래서다.

현재 내연기관차를 서서히 대체하고 있는 전기차는 19세기에 이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전기차는 배터리 무게와 긴 충전시간 등 기술적 한계와 내연기관의 성능 개선이 더해지며 사라졌다. 제너럴모터스(GM)는 1990년대 EV1으로 전기차를 재등장시켰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전기차가 비로소 자리 잡은 것은 2010년대 이후부터다.
최근 전기차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GM은 2010년 한 번 충전하면 410㎞대를 달릴 수 있는 EREV를 내놨다. 배터리로 80㎞까지 달린 뒤 내연기관 엔진을 가동해 만든 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하며 모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BMW도 이러한 방식의 i3 REx를 만들었다. 이들 EREV는 굳이 화석연료로 전기를 만들 필요가 있냐는 반응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다시 등장했다. 더딘 충전 인프라 확대를 해결할 대안으로서다.
EREV는 순수전기차보다 주행거리가 길어 국토가 넓은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EREV 판매량은 131만대로 2023년(65만대)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향후 EREV가 미국 등에서도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되며 스텔란티스그룹의 램은 올 하반기 약 1100㎞를 주행할 수 있는 EREV 픽업트럭 램차저 1500을 판매할 계획이다. 포드는 상용 밴 트랜짓 EREV 모델을 2027년 공개할 예정이며, 폴크스바겐은 첫 EREV 콘셉트 모델 ID.에라(Era)를 공개한 데 이어 북미로 수출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일찌감치 전기차 정체 시기를 넘을 대안으로 EREV를 점찍었다. 현대차는 내년 북미와 중국에서 EREV시스템을 적용해 양산을 시작하고 2027년부터 판매할 계획이다. KG모빌리티도 최근 전기차 수준의 주행 성능을 갖춘 하이브리드 시스템도 개발해 향후 EREV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근 이란이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시사하며 국제 유가가 출렁였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휴전에도 전 세계의 불안한 시선은 여전하다. 기름값이 어떤 이유로든 오르기 시작하면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나 하이브리드차, 나아가 새로운 EREV를 선호하는 현상은 가속될 수밖에 없다. 시대와 기술이 만났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백소용 산업부 차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