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여성의 날은 더욱 조용하게 지나갔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얼마 전 UN 여성기구가 여성의 날을 앞두고 발표한 여성권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정부 네 곳 중 한 곳에서 여성권리 향상 운동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거의 글로벌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한 발 더 나갔다. 취임 직후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을 ‘급진적이고 낭비적’이라고 비판하며 연방정부의 DEI 정책을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 트럼프 DEI 정책 폐기에
디즈니는 동조, 애플은 반발
포용적 조직문화는 전략 자산
신세대 마음 얻는 핵심 역량

이제 DEI 정책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대응하는 기업의 움직임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법적 리스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공통점이지만 실제 행동하는 방향은 엇갈린다. 일부 기업은 빠르게 DEI 정책을 축소하고 있다. 디즈니는 소수계 및 다양성을 강조하던 콘텐트 전략을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펩시는 웹사이트에서 DEI 관련 언급을 삭제했다. 구글·아마존·메타 등도 DEI 관련 부서를 축소하고 채용에서 인종이나 성별을 고려한다는 내용을 지우고 있다. 대외적인 선언은 자제하고 내부적으로는 다양성·포용성을 추진할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기존의 정책에서 후퇴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르게 대응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그동안 DEI 정책을 전략적으로 추진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던 기업들의 대응은 단호하다. ‘포용적 조직문화’를 정착시킴으로써 내리막길을 걷던 회사를 회생시키고 사상 유례없는 재무성과를 기록 중인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사티아 나델라, DEI 가치를 천명하고 지속적인 혁신으로 기업가치를 10배 이상 상승시킨 애플의 CEO 팀 쿡, 월가의 리더로 인정받는 JP 모건 체이스의 CEO 제이미 다이먼 등은 ‘DEI 정책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대통령의 행정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DEI를 지키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업의 성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애플은 ‘다양성과 포용성이 기업의 혁신과 성과를 높인다’는 철학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선언했으며 시스코 역시 ‘다양한 인재들이 모였을 때 성과가 더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P&G의 CEO 존 뮐러도 성명을 내고 ‘평등과 포용은 우리 비즈니스에 유익하며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코스트코·세일즈포스·나이키·델타항공·핀터레스트 등 강력한 DEI 문화를 가지고 있는 조직일수록 그 문화를 ‘전략 자산’으로 인정하고 지키려는 모습이다.
이렇게 엇갈리게 대응하는 기업들을 보면서 옥석이 가려진다는 느낌이 든다. 시대적 트렌드를 따라 DEI 정책을 도입했던 기업들은 환경이 바뀌면 쉽게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전략적 차원에서 DEI를 추진하면서 조직문화로 정착시킨 기업들은 성과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소비자들도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DEI 정책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하버드 대학 로빈 엘리 교수의 연구 결과를 떠올리게 된다. 엘리 교수는 90년대 중반부터 20년 넘게 ‘다양성이 기업 성과에 도움이 된다’는 명제를 믿고 연구를 했지만 결과가 일관되게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명제가 왜 증명되지 않는가에 대해 고심하던 엘리 교수가 발견한 것은 ‘다양성과 포용성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었다. 즉 다양성만으로는 성과를 내기 힘들고 포용적 조직문화일 때 다양성이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DEI 정책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조직문화가 포용적이지 않을 때, 사회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조직의 리더가 정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하고, 제대로 추진한다면 DEI 정책은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단지 젠더의 문제가 아니다. 갈수록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받기 원하는 신세대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포용적 조직문화는 핵심역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 존재감 없이 지나간 여성의 날을 생각하니 아쉽다. 미국이나 EU처럼 DEI 정책을 폭넓게 실행해보지도 못했고, 디즈니처럼 최전선에서 경계를 확장하며 논쟁을 불러일으킨 기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가 덩달아 외면한 것은 아닌지.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크고, 여성경제활동비율은 최하위권이며, 출산율은 세계 최저기록을 세우는 우리에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대 교수·대외협력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