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2년 전에 나온 어느 최고급 아파트의 분양 광고 문구다. 이 광고엔 ‘천민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지만, 그런 비판을 한 사람들은 언제나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는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미국의 진보적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에릭 호퍼는 “우리는 주로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 평등을 주장한다”고 했다. “누군가가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분야는 자신이 절실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자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내 안의 차별주의자: 보통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이란 책에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며 “스스로의 ‘개방성’과 ‘관용’ 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등을 강조하지 말자거나 불평등에 대해 너그러워지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평등을 지향하는 정책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국엔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냉정한 이해를 해보자는 뜻이다. 그래야 입으로만 지지하는 평등에 대한 위선과 기만을 걷어내고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10년 전에 출간한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갑질공화국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개천(특히 지방)의 모든 자원, 특히 심리적 자원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전 국민으로 하여금 개인과 가족 차원에서 용이 되기 위한 ‘각자도생’에 몰두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 모델을 깨지 않는 한 지금의 과도한 지역 간 격차, 학력·학벌 임금격차, 정규직·비정규직 격차와 그에 따른 ‘갑질’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정도의 주장엔 대부분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책은 심지어 ‘불온서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미 6년 전에 낸 책에 소개한 에피소드를 재활용하는 걸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내가 매주 하던 ‘글쓰기 특강’ 수업을 듣던 학생이 쓴 글인데 읽다가 웃음을 빵 터뜨릴 정도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다시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여야, 민생은 없고 부자 감세 협치
“나는 택시 아저씨의 좋은 이야기 동무다. 아마도 다른 사람 말을 들을 때,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택시 아저씨는 학교를 가는 길에 ‘저기 풀밭에 핀 꽃의 이름을 아느냐’부터, ‘우리는 저것을 먹고 자랐다’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택시 아저씨는 피곤함이 가득한 젊은 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을 내라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화근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라는 책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를 응원하던 아저씨는 책 표지를 보시고는 불온서적을 보듯 화를 내셨다. 아니,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아저씨는 자신의 성공한 친구들부터, 친척의 친척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자네 학생인가?’ ‘아니요. 졸업했어요.’ ‘그럼 학교를 왜 가…’ 차마 이 책의 저자가 하는 강의를 듣는다고 말은 못했다. 강의실까지 쫓아오실까 봐.”
이 에피소드가 시사하듯이,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을 계층 이동에 반대하는 주장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을 예찬하면서 그걸 정치적 슬로건으로까지 이용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개혁 대상의 범주를 정하는 일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1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슬로건은 “1% 대 99% 사회” “우리는 99%다” “탐욕스러운 기업과 부자에게 세금을!” 등이었다. 이 시위는 전 세계로 번져 나갔고, 한국에서도 “1%에 맞서는 99% 분노” “1%에게 세금을, 99%에게 복지를” 등과 같은 슬로건을 내세운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과연 ‘1% 대 99% 사회’라는 프레임은 옳은가?
‘1% 대 99% 사회’ 프레임의 폐해
영국 출신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의 <20 대 80의 사회>는 이 프레임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리브스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달러가 넘었다는 점, 그리고 2015년 1월 말 오바마 행정부의 세제 개혁안이 당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낸시 펠로시 등의 강력한 반대로 죽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세제 개혁안은 상위 20%에 속하는 중상류층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민주당 내에서 강경한 진보 노선을 걸어온 펠로시가 그랬다는 게 흥미롭다. 그런데 상위 20%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최상위 1%만 문제 삼는 것으로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미국보다는 오히려 한국에 더 절박하다. <불평등의 세대>의 저자인 서강대 교수 이철승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우리 사회는 정규직 노조와 자본이 연대해서 하청과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야는 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우지만, 한겨레의 이틀 전 사설 제목처럼 “민생은 온데간데없고 고소득층 감세 협치하는 여야”가 아닌가.
더 평등지향적이어야 할 민주당은 미국 민주당의 “1% 대 99% 사회” 노선을 흉내 내고 있다. 늘 1%만 문제 삼으면서 20%에 속하는 대기업 정규직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다. 민주당이 진보적 정책인 것처럼 추진했거나 추진하려 하는 최저임금제, 주 52시간제, 주 4일제 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미 4년 전 진보적 정치경제학자인 홍기빈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주 4일제와 정규직 중심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주 52시간 노동도, 최저임금도, 심지어 작업장 안전조차 일률적으로 감시와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장이 허다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 혜택이 제대로 갈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불안정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등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삶의 불편과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결국 은행, 관공서, 공기업, 대기업, 대학과 학교 등 정규적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는 혜택이 극히 불균등하거나 전혀 없거나 오히려 ‘벼락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다.”
홍기빈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주로 상위 20%를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을 “과연 진보적인 사회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주 4일제’ 제안은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럽이나 서구의 진보정책을 그대로 가져와 ‘쿨하게’ 보이는 데에 집착하는 우리 진보 진영의 버릇이 나타난 예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가 300만명을 돌파했다는 통계가 나왔으면, 그 통계를 검증해보면서 최저임금제의 최대 수혜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걸 따져보는 열띤 논의가 있어야 했건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영업자들이 평균 1억9000만원대의 빚을 지고 있다는데, 이들도 자본가라는 이유로 외면하는가? 하긴 자영업자는 죽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게 한국형 진보의 특성이긴 하다.
대기업 정규직만 챙기는 진보도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묘한 건 진보 진영은 이런 문제 제기를 하면 과거 보수 세력이 써먹었던 색깔론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노동귀족’이란 말은 마르크스의 친구 엥겔스가 노동자 계급 내부의 특권층을 지적하기 위해 쓴 말이건만, 한국에선 이 말을 쓰면 ‘반노조’ 의식에 찌든 ‘수구꼴통’이나 ‘극우’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상위 20%의 기득권은 사실상 진보적 소통 채널마저 장악하고 있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걸 어렵게 만든다. 이게 바로 ‘1 대 99의 사회’ 프레임의 산물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