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 내일(14일)로 다가왔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최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전념으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는 성균관(成均館)이다.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다. 1298년(충렬왕 24년)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으로, 1308년에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했다. 1356년(공민왕 5년)에는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환원됐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돼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존치됐으며 태학(太學)·문묘(文廟)·반궁(泮宮)·현관(賢關)·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성균’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는 말의 각각 앞 글자를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 있다. 보통 서원은 교육 공간을 앞에 놓고 제향 공간인 사당을 뒤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건물을 배치하는데, 반대로 성균관은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있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사진)을 뒤에 놓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배치했다. 대성전은 공자와 옛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드렸던 곳이고, 명륜당은 유생들의 배움의 장소이며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의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숙소로 각각 18칸으로 구성됐다. 유생 숙소의 맨 마지막 칸에는 의원의 처소를 두어 학업으로 아프거나 병든 유생을 돌봤다고 한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무료였고, 유생들을 돕는 노비를 각각 한명씩 제공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유생의 평균 나이가 30대였다고 하니 성균관에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가운데 고구려(高句麗)편을 보면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해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는 고구려 때에도 공부하기를 좋아한 민족인 것 같다. 수험생들이 사고 없이 노력한 만큼 결실이 있기를 바라며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를 응원한다.
이규혁 건축가·한옥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