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높인 김정은, 핵 인정받는다 해도 갈 길 멀어

2025-10-30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찾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어제 귀국했다. 그는 방한 기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우리 국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라 칭하고, 공개적으로 체제 일정을 연장할 수 있다고도 했다. 북한의 반응이 없자 대북제재 해제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까지 나갔다. 그러나 북한은 응하지 않은 채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전날(28일) 함대지 순항 미사일 발사로 대신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누굴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 반대로 김 위원장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막판까지 대북제재 해제에 매달렸던, ‘내가 내일 판문점에 간다’는 트럼프의 트위터 한 문장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김 위원장이 아니었나.

김정은·트럼프 깜짝 만남 불발

분명한 선물 들고 오라는 신호

중요한 건 인민들 잘 먹이는 일

한국 배제한 경제 발전은 요원

‘북 가계소득 50% 감소’ 연구도

여전히 북한 경제는 어렵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북한의 경제성장률을 3.7%로 발표했지만, 일부 전문가는 과대 추정으로 여긴다. 설령 정확한 추정이라도 대단한 성장은 아니다. 북한의 경제 규모가 워낙 작아 3.7%의 성장이란 양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북한 주민들은 1990년대 중반 최악의 경제난을 겪었다. 2010년 중반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무게를 더했다. 2020년대 들어 국가가 상업과 무역을 주도하면서 그나마 주민들이 생계를 의지했던 시장 활동도 녹록지 않아 주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북한 주민들의 가계 소득이 제재 이전보다 약 50%, 국내총생산(GDP)은 25%가량 감소했다는 연구도 있다. 집권 초기 효율성 제고와 자율권 확대를 통해 성장세를 이끌었던 김정은의 경제정책은 이제 실패한 것인가.

오히려 큰 틀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대내적·경제적으로는 부담이었지만, 대외적·국가적으로는 이익이었다는 말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은 북한에 큰 충격이었다. 타협과 대결의 갈림길에서 북한은 후자를 선택했다. 2019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는 ‘정면돌파전’을 새로운 길로 내걸었다. “우리 당은 또다시 간고하고도 장구한 투쟁을 결심했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는 핵 개발 지속을 천명했다. 북한이 택한 것은 구호로는 ‘강대강’이었지만, 내용은 ‘버티기’였다. 그래서 ‘자력갱생’에 대한 북한의 강조는 한층 높아졌다. “적들의 방해 책동이 악랄해지고 엄혹한 난관이 중첩될수록 더욱더 자력갱생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난이 심각해져도 자력으로 버틸 수 있다는 시위이자, 자신들의 핵 능력은 점점 확대될 테니 빨리 대화로 나오라는 대미 메시지였다.

시간은 북한 편이라 여기고 밀어붙였다. 지난 27일 노동신문은 “위대한 당의 영도 따라 자생자결을 체질화”한 북한의 힘을 “그 무엇으로도 당해낼 수 없다는 진리를 세계 앞에 보여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에게 러브콜을 보냈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최종 전갈인 셈이었다.

김 위원장의 계획은 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가 닳았다. 오래된 동맹을 홀대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수십 년의 ‘적국’에 대해 아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저자세를 보였다. 일단 이번에는 김 위원장이 이겼다. 하노이 굴욕을 갚았다고 할 수도 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회동 제의를 수락할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몸값은 더 높아질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공식적인 친서도 초청장도 없는데,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말뿐인 쇼맨십에 맞장구쳤다가 낭패 볼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핵 보유와 제재 완화에 대한 확실하고도 공개적인 확약이 없는 한 깜짝 만남은 자칫 하노이의 재판이 될 뿐이었다. 지난 26일 최선희 외무상을 전용기에 태워 외국에 보낸 것도 이번엔 안 만나겠다는 신호였고, 트럼프 대통령이 주일 미군기지를 방문하던 날 그곳을 타격권으로 하는 미사일을 발사한 것도 다음에 더 크고도 분명한 선물을 들고 오라는 주문이었을 수 있다.

올해 말이든 내년이든 북·미 정상이 만나고, 미국은 북한의 핵을 인정하고 제재 해제까지 해줬다고 치자.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김 위원장은 맘 편히 지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 2012년 집권하자마자 첫 번째 공개 연설에서 주민들에게 했던 김 위원장의 약속이 왜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는지를. 2013년에는 경제 건설을 핵 개발과 같은 위상에 올린 ‘병진’을 자기 시대의 슬로건으로 발표했고, 2016년 신년사에서 “우리 당은 인민 생활 문제를 천만가지 국사 가운데서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있다”고 말해야 했는지를.

이유는 명확하다. 핵은 외부로부터 체제를 수호할 수단이지만, 내부로부터 정권을 지킬 방법은 경제성장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지면 주민의 지지는 떨어지고, 아무리 독재라 하더라도 정권 안정성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핵 개발을 지속하면서도 틈만 나면 경제를 강조했고, 지난해부터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적대적 두 국가’ 선언, 한국 기업 발목

언젠가 북·미 정상회담을 열어 핵도 인정받고, 경제제재가 해제된다 한들 경제는 당장 좋아지지 않는다. 정치적 리스크가 큰 데다 핵까지 가진 나라에 진출할 기업은 없다. 제재가 없던 시절에도 북한과 무역할 품목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북한 투자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경제안보의 시대, 가격경쟁력보다 안정적인 공급망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됐다. 더욱이 경제 협력에 가장 적극적일 한국에 대해 ‘적대적 두 국가’라고 못 박아서 우리 기업은 아예 북한에 갈 수도 없다. 한국 기업조차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외국 기업이 선뜻 대북 경협에 나설 리 만무다.

김 위원장이 지금 당장은 기세등등할 수 있으나 새로운, 더욱더 무겁고 본질적인 고민에 빠질 것이다. 남북 경협이 외국 기업 유치의 리트머스 시험지인데, 선언한 지도 얼마 안 되는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을 철회하자니 권위가 안 서고, 그렇다고 어렵게 받아 낸 핵 보유인데 경제를 위해 스스로 다시 양보하겠다고 하자니 명분도 없고. “이젠 어떻게 하지?” 그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명예교수·북한앤글로벌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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