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솟는 빈 달무리

2025-03-27

시인은 말을 아낀다. 굳이 꺼내지 않고 감추어 둔다. 그런데 그 때문에 상상의 세계가 아득히 열린다. 여기에 음악의 감흥이 두둥실 거들어주면 그 비밀스러움은 언어 세계를 휘이 넘어 나래를 펼친다. 우리 가곡에도 그처럼 암향(暗香)이 그득한 작품이 있다.

박목월 시인의 ‘달무리’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정경이다. 한 사내가 달무리 뜨는 밤을 홀로 거닌다. 그는 옛날에도 이런 밤에 거닐었다고 한다. 밤에 취한 넋두리.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도 둥둥 달무리가 뜬다. 여전히 홀로 거닐지만 마음속 달은 그를 울게 한다. 옛날에도 이런 밤에 울며 걸었다 한다. 아, 그의 걸음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을까. 어떤 달빛이 그의 마음을 여태까지 비추는 것일까.

윤이상은 낭만적이고 따뜻한 펼침화음으로 곡을 연다. 탄주악기를 뜯으며 밤을 지새우는 가객의 명상적인 정조가 작품 내내 장조와 단조를 넘나들이하며 흐른다. 마치 달의 밝음과 시적 화자의 외로움 사이를 번갈아 비추는 듯하다. ‘나 홀로 가노라’하고 부를 때는 호젓한 밤의 홀가분한 기분이 아름다운 굴곡을 그리며 펼쳐진다. 하지만 그 굽이치는 가락을 ‘옛날에도’ 하는 상념이 곧 끊어놓는다. 바깥 달(1연)을 마음 달(2연)로 옮겨왔더니 울음 때문에 빛이 흐려진다. 그러나 그 눈물조차도 저 달빛처럼 맑고 또 영롱하다.

시가 감추어 놓은 것을 음악이라고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은 시 속에서 걷는 사내의 마음속 걸음걸이를, 따라 걸어볼 수 있게 한다. 마법적인 신비감의 피아노도 그 마음속의 달을 은은하게 옮겨준다. 비밀은 여전히 비밀인데 듣는 이는 왠지 알 것만 같다.

시를 노래하는 일이 드물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꾸 자신을 드러내야 살아남는 시대여서일까. 시가 말을 아껴두는 것은 그만큼 소중해서다. 그런 소중함을 아는 이만이 밤도, 달도, 울음도 모두 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