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을 추첨으로 뽑는다고?”
후배 기자들이 해외에서 취재한 기획기사 초고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한국의 의대 입시에선 상상하기 힘든 입시제도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명문 에라스무스 의대는 올해 400명 신입생 중 1~200등은 성적순으로, 나머지는 35%의 임의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뽑았다. 65%의 성적이 반영되니 완전 추첨제는 아니어도 임의점수(35%)가 추첨의 효과를 냈다. 성적이 상대적으로 나빠도 의대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 능력주의 선발에 대한 ‘견제장치’였다.
응급실과 시골의 의사 부족은
능력·돈 우선 사회의 역기능
인간의 연대감이 해결 실마리
세계의 ‘닥터 로드’는 외길이 아니다. 해외 선진국도 의사가 선망의 직업임에도 한국과 달리 진입장벽이 아닌 진입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로테르담에서 후배 기자가 만난 입시 담당 교수의 설명은 이랬다. “성적이 좋은 ‘과잉 성과자’만 의대에 모이면 특정 학과나 업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더 강해질 수 있다.”
똑똑한 순서로 의사가 되는 것이 사회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험칙이 제도를 바꾸고 있다. ‘실용(實用)의 나라’ 네덜란드는 주류 의사만 있을 경우 비주류 환자가 소외될 수 있는 부작용을 경계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 의대 교육 부학장 마틴 프렌즈 교수는 “매우 복잡한 학문과 수술을 하는 의사는 일부이고, 대부분은 사회에 참여하며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관리자에 가깝다”며 추첨제의 효능을 설명했다.
한국 의료 소비자의 마음에 와닿는 진단이다. 하지만 능력과 돈이 우선이 되어버린 우리 의료 생태계에선 ‘루저의 변명’처럼 들릴 것 같다. 그곳에선 추첨제 의대생이 패배자로 치부되지 않았다. 해당 의대 역시 한국 최고 수준 의대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류큐대의 ‘낙도 지역정원제 전형’은 주민 수가 300명이 되지 않은 외딴섬에도 주치의가 있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의대 졸업 후 9년 정도 의무적으로 섬에서 일하게 하는 이 제도엔 디테일이 살아 있다. 류큐대 의대 신입생 110명 중 15명 정도가 지역정원제 출신인데, 이들은 외딴섬에 1~2주씩 현장 실습을 가고 아동들에게는 의료·교육 봉사를 하며 지역 축제에 참여하는 등 지역 전문가로도 성장한다. 대학 부속 병원장은 “선의와 믿음만으로 지역 의료 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긍지와 확실한 보상, 그리고 페널티가 적절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했다.
의술을 넘어 인술을 구현하는 의료 체계를 갖추는 건 세계 어디서나 머리 싸매고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네덜란드에서도 “추첨제보다 능력주의 선발이 낫다”는 반론이 있어 제도 폐지와 재도입이 반복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는 응급구조원 경력을 의대생 선발에 가산점으로 활용하고 환자가 의대 강의에 참여하는 제도 등을 개발한다.
한 사회가 의료인에게 기대하는 ‘선의와 믿음’은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 촘촘한 제도로 만들어진다는 걸 세계의 다채로운 닥터 로드는 보여준다. 의대생 숫자에도 합의점을 못 찾고 여·야·의·정 협의체가 가동조차 안 되는 한국의 처지가 참담하긴 해도, 우리 역시 인류사적 고민을 함께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말과 생각이 의·정 갈등 해결에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본다. 노벨상 수상 1년여 전, 한강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기념해 파리를 방문해 이런 말을 했다. “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쓴다는 건 단지 과거의 일을 쓰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 4·3사건을 모르는 프랑스 독자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해외 선진국의 독특한 닥터 로드 또한 인간 본성을 탐구한 결과물이기에 공감이 되는 것이리라. “인간은 서로 연결돼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한강 작가의 슬프고도 집요한 믿음을 이참에 여·야·의·정 모두 음미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