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대학로 공연 3분의 1 이상이 오픈런 공연
코로나19 이후 오픈런 시장 크게 위축...전체 공연 시장 1% 안팎
‘오픈런’(Open Run)은 뮤지컬이나 연극 등에서 기한을 정하지 않고 하는 공연을 뜻한다. 폐막일을 미리 정해 놓고 공연하는 ‘리미티드런’(Limited Run)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오픈런 붐이 일기도 했지만, 2020년 이후엔 대부분 리미티드 런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오픈런 공연 시장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반면 세계 연극,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나 미국 브로드웨이 관객들에게 오픈런은 익숙하다. 10년 이상의 오픈런 공연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1985년부터 39년 째,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부터 38년째 공연 중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브로드웨이에서도 35년간 공연했는데, 이는 기네스북 공인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기록이다. 뮤지컬 ‘캣츠’ 역시 웨스트엔드에서 21년, 브로드웨이에서 18년간 오픈런으로 공연했다.
국내 공연계는 1994년 극단 학전의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이 한국 공연계의 오픈런 시대를 열었고, 1998년 초연된 연극 ‘라이어’는 오픈런으로 연극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후 대학로 일대에는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이하 초연 년도 2001) ‘보잉보잉’(2002)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2003) ‘빨래’(2005) ‘오! 당신이 잠든 사이’(2005) ‘김종욱찾기’(2006) ‘쉬어매드니스’(2006) ‘옥탑방 고양이’(2010) 등 오픈런 공연들의 인기가 높아졌다.
2012년 소극장협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대학로 154개 공연장 중 ‘라이어’ ‘옥탑방 고양이’ ‘보잉보잉’ ‘김종욱 찾기’ ‘스페셜 레터’ 등 특정 극장에서 진행되던 오픈런 공연은 물론, ‘염쟁이 유씨’ ‘빨래’ 등 1년 내내 공연하지만 자체 공연장이 없어 공연장을 바꿔가며 공연을 이어가는, 사실상 오픈런 공연과 같은 공연이 56편에 달했다. 이는 전체 대학로 공연의 약 3분의 1이상이다.
‘라이어’ 관계자는 “공연이 처음부터 오픈런으로 기획됐던 건 아니었다”면서 “당시엔 지금과 같은 티켓 판매 시스템도 없었던 시대였다. 티켓을 사려면 공연장 앞에 티켓 박스에서 길게 줄을 서야 했는데, 실제로 줄을 길게 늘어선 관객들 덕분에 당일 공연 티켓은 물론 일주일, 한 달치 티켓까지 전부 매진이 되면서 공연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연이 오픈런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대관료와 인건비는 고정비 성격이기 때문에 공연 횟수가 많아지면 수익률이 올라간다. 리미티드런 성격의 한국 공연계에서도 최대한 장기간 공연을 진행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오픈런 공연은 대개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많은 관객을, 오랜 기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공연을 접하기 상대적으로 쉬워 ‘입문용’ 초심자용‘ 공연으로 인식된 면도 있다. 이 때문에 오픈런 공연을 통해 공연의 매력에 빠진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픈런 공연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 관계자는 “오픈런 공연의 최고 전성기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라고 말했다. 오픈런이 등장했던 시기가 최고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2023년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오픈런은 전체 공연 시장에서 공연건수 226건으로 전년 대비 79.6% 감소했다. 전체 공연 시장에서 고작 1.1%에 불과한 비중이다.
2022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이 컸던 2021년 동기 대비 공연 건수가 22%가량 큰 폭으로 증가했지만, 2020년과 비교해 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사실상 오픈런 공연 시장이 위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당시에도 오픈런 공연 건수가 전체 공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 안팎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가장 최근인 ‘2024년 3분기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서도 전체 공연 시장에서 티켓예매수 기준 오픈런 공연은 전년 대비 10%대의 감소 폭을 보였고, 티켓판매액 기준 16.4%로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연극 분야의 상위 10개 작품에서도 ▲맥베스 ▲엔젤스 인 아메리카 ▲햄릿 ▲빵야 ▲벚꽃동산 ▲일리아드 ▲꽃, 별이 지나 ▲사운드 인사이드 ▲한뼘사이 ▲불편한 편의점 등으로 오픈런 공연은 단 2건에 그쳤다.
현재 대학로 연극가에서 오랜 기간 명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는 ‘라이어’ ‘옥탑방 고양이’ ‘쉬어매드니스’ ‘늘근도둑이야기’ 정도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오픈런 공연이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그동안 연극을 자주 보지 않는 관객들이 처음 입문하는 공연이 오픈런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이제는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는 대형 연극으로 돌아선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픈런 공연이 우후죽순 생기던 시기, 이와 관련한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기 때문에 오픈런은 충분히 공연계에서도 존재 가치가 증명됐다. 한 관계자는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장기간 공연을 통해 배우와 스태프들의 호흡이 맞아떨어지면서 작품의 완성도, 배우들과 스태프의 팀워크가 깊어질 수 있고, 관객의 반응을 살피면서 작품을 수정, 보완해 작품을 더 발전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관객들에게 ‘공연 입문 통로’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연출진이나, 배우들에게도 안정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 관계자는 “오픈런 공연은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실험적인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다. 관객 참여 형식을 도입해 오픈런 공연으로 성공을 거둔 ‘쉬어매드니스’가 대표적”이라며 “창작진은 물론 배우진을 꾸리는데 있어서도 신인 배우들에게 꾸준히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기성 배우들에게도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픈런은 공연계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