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폭풍과 격랑에도
‘초일류 해양강국’은 불변의 꿈
韓·美 함정협력 확대, 잠수함 수출 등
K-조선·방산 새해 도전은 계속될 것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9세기 말 유럽의 낡고 병든 가치관을 사정없이 깨부수고자 했다. 독일 병정 같은 표정에 난해한 상징과 패러디를 남용한 탓에 몹시 불친절해 보이지만 인류애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계몽주의자였다. 그의 눈에 비친 진정한 가치는 나약한 동정심과 자기연민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을미년 새해는 난감한 시련과 함께 시작됐다. 난데없는 폭풍과 격랑에 국가 전체가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 거리의 수많은 외침이 어떤 이데아의 발현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스스로를 허약하게 만드는 자기합리화는 허세와 사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남들은 각자 힘을 키우고 약자를 지배하려 들 것이다. 그건 자연법칙이자 역사의 교훈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우리에겐 흔들려선 안 될 꿈과 목표가 있다. ‘초일류 해양강국’을 향한 대한민국호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의 고난과 고통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한 내일의 나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니체의 신념이 새해 화두가 되길 바라는 까닭이다.
해양강국으로 가는 항로에는 올 한해에도 수많은 도전과 기회들이 잠복해있다. 그중에서도 한·미 간 함정협력 확대는 핵심 어젠다가 될 것이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미 해군 MRO(유지·보수·정비) 사업은 본격적인 확장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비전투함에 국한된 MRO 범위는 이지스함, 잠수함 등 전투함으로 넓어질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미 해군 함정의 신조 참여도 얼마든지 기대할만하다.
한국을 향한 미국의 러브콜은 단순한 외교적 레토릭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복된 공언을 통해 이미 그 진정성은 확인됐다. 특히 미국 의회는 향후 30년간 보유 군함을 364척 증강하기 위해 1조 달러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추산한 보고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엔 아직 우리가 접근하기 힘든 항공모함과 핵잠수함까지 포함되지만 거대한 황금어장에 VIP급 초대장을 받을 전망은 매우 밝다.
한화오션이 지난해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며 선제적 행보에 나선 것도 이처럼 먼 곳을 내다보는 중장기 포석이었다. 그 비전이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조선·방산 분야의 한미협력 강화는 먹구름이 드리운 한국경제 전체에도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장보고-III’를 만들어낸 잠수함 강국으로서 한국산 잠수함을 세계 무대에 진출시키는 것 역시 새해 중대 과업 중 하나다. 북미, 유럽, 중동, 아시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잠수함 도입 프로젝트는 조만간 가시권에 들어설 예정이다. 잠수함 수출의 물꼬가 트인다면 ‘K-방산의 퀀텀점프’를 완성시키는 동시에 한국 해양사에 새 장을 여는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만 전략자산급 함정 수출은 기존 방산 제품과 차원이 다른 고도의 전략과 접근법이 필요하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 등 월드클래스와의 경쟁은 도토리 키재기 같은 국내 환경과 비교하기 어렵다. 기업과 정부가 어벤져스처럼 하나의 팀으로 힘을 모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내에서 장기 갈등을 빚어온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부터 상호협력과 신뢰의 토대 위에 대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기반으로 잠수함에 이어 구축함, 호위함 등 수상함 수출까지 염두에 둔 큰 그림이 그려지길 기대한다.
민간 상선 분야에서도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지난 한 해 중국의 쓰나 미식 저가 물량 공세 속에서 한국 조선업은 기술우위로 맞서왔다. 그 흐름은 올해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화오션의 경우 올해 진수 예정인 36척 가운데 25척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다. 여기에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과 가스운반선(VCGC)이 가세하며 선종 구성도 다양해진다.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는 중국의 몸부림은 점점 더 거칠어질 것이다. 우리로선 LNG, 암모니아, 메탄올 같은 친환경 선박과 해양플랜트, 쇄빙선 등 차별화된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유일한 활로다. 이를 위해 생산과정에 인공지능(AI), 로봇, 빅 데이터를 활용하는 스마트조선소 시스템도 한층 더 첨단화해나가야 한다.
인간의 미래는 아무리 열심히 대비해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예측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이 바로 리스크다. 어떤 분야든 리스크는 곳곳에 널려있다. 우연에 의해 역사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0년 후 어떤 변화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10년 후에도 바뀌지 않을 게 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건데.”
누구나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섣부른 예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을 기반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변의 법칙’이라는 총명한 저서를 펴낸 모건 하우절의 지혜다.
한국은 또 한 번 위기에 직면해있다. 하지만 진짜 실력은 위기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잔잔한 파도 위에서 순항할 때는 누구나 멋진 선장이 될 수 있다. 거센 격랑을 뚫고 가야 할 때 발휘되는 리더십과 협업능력이 실력의 본질이다.
이 폭풍우의 끝에는 보란 듯이 쾌청한 항로가 나타날 것이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그것이 해양강국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불변의 법칙이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