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상기된 표정의 앳된 소년 7명이 차이콥스키 음악 ‘백조의 호수’에 맞춰 한발을 곧게 드는 동작을 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발레 연습실의 봉 대신 의자를 잡고 연습을 하는 장면이다. 바로 이어서 옷을 갈아입더니 팝스타 리한나의 ‘루드 보이(Rude Boy)’ 선율에 따라 강렬한 스트리트 댄스 군무를 선보였다.

지난달 31일 서울 양재동 소재 신시컴퍼니 연습실에서 열린 ‘쇼앤텔’(SHOW AND TELL)‘ 현장 모습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 역 후보 7명, 빌리의 친구 마이클 역 후보 6명이 제작진과 부모들 앞에서 치른 최종 오디션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가난한 탄광촌 소년 빌리가 발레를 접하며 꿈을 펼치는 여정을 그린 뮤지컬이다. 2000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2005년 영국에서 초연했다. 한국에선 2010년 처음 선보였고 2017년과 2021년 재연, 삼연 개막을 했다.
2010년 토니상 10관왕에 오르는 등 동명 영화 못지않은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독특한 장기 오디션 과정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역 배우들에게 직접 춤과 연기, 노래를 지도한 뒤 최종 배우를 낙점한다. 과거 공연에서는 빌리와 마이클 역을 각각 4명이 맡았고 올해도 큰 변수가 없다면 이 숫자로 뽑히게 된다.

이번 오디션의 경우 2013~2016년 출생(만 8~12세), 150㎝ 이하의 키,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소년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9월 1차 오디션에 빌리 역 139명, 마이클 역 117명이 지원했다.
이들은 1차 오디션 통과 뒤 ‘빌리 스쿨’로 불리는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1차가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2월 초까지 진행됐고, 일부가 추려져 올 2월 말부터 지난달까지 2차가 진행됐다. 후보들은 매주 월~토요일에 하루 4~5시간씩 발레, 댄스, 보컬 등을 배웠다.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빌리 엘리어트’ 공연에서도 동일한 과정을 진행한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세계적인 발레단 마린스키에 입단한 전민철도 2017년 공연의 빌리 역으로 지원해 최종 후보까지 올랐지만 고배를 마셨다. 갑자기 키가 커졌고 목소리도 굵어진 영향이라고 한다. 당시 함께 경쟁해 빌리 역에 낙점된 배우 천우진은 현재 공연 중인 연극 ‘렛미인’에서 외톨이 소년 오스카를 연기하고 있다.
이날 아이들은 제법 발레리노 같은 우아한 몸짓을 보였다. 13명의 소년이 발을 맞추며 나름의 ‘칼 군무’를 연출한 탭댄스는 그간 이들이 흘린 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부모와 제작진들은 환호성과 함께 그간의 여정에 대한 애틋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는 “오늘은 10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일차적으로 마감하는 자리”라며 “무용 턴 한 바퀴 돌 줄 모르던 평범한 아이들이 연습을 통해 긴 공연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게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에드 번사이드 해외협력 연출은 “이 작품의 오리지널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는 빌리 역을 ‘마라톤을 뛰면서 동시에 햄릿을 연기하는 것’에 빗댔다”며 “이 작품에서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다른 공연과는 차원이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고정적인 틀을 정해 선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빌리를 똑같이 정해 놓고 로봇처럼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오디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 대해 잘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톰 호지슨 해외협력 안무가는 “몸을 움직일 때 감정을 같이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며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아도 감정적 스파크를 가진 아이를 찾으려 한다”고 전했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은 제작진의 큰 보람이다. 이정권 국내협력 안무 및 탭 코치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분노 게이지가 높아져 근처 절에 다녀오곤 한다”면서도 “마지막까지 노력해서 무대에 선 아이들을 보면 그 모든 게 보상 받는 느낌”이라고 웃었다.

국내 초연 당시 성인 빌리역으로 무대에 섰던 신현지 국내협력 안무 및 발레 코치는 “타이즈를 입는 것도 부끄러워 하는 남자아이들을 설득하는데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라며 “작품 속 빌리의 성장 과정도 트레이닝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날 오디션에서 최종 선발되면 내년 4~7월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무대에 오르게 된다. 선발된 배우들을 위한 3차 빌리 스쿨이 다음 달부터 진행된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이 작품은 부모님들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그 노고를 잊지 않고 있다”라며 “최종 선발되면 1년간 더 고생하셔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