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카드 쥔 트럼프의 '개혁 압박'…유엔 사무국은 지금 패닉상태

2025-04-28

황준국 대사가 전하는 '창설 80주년 맞은 유엔 현주소'

국제연합(United Nations·유엔)은 1945년 4월 25일 개막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한 50개국 대표들이 두 달 뒤에 유엔 헌장에 서명하면서 그해 10월 24일 공식 창설됐다. 올해는 유엔이 탄생한 지 80주년 되는 뜻깊은 해다. 1차 세계대전의 교훈으로 1920년 출범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하자 집단 안보를 위해 새로 창설된 유엔은 지난 80년간 '세계 평화의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2022년 러·우 전쟁과 2023년 중동전쟁은 물론이고 북한의 핵 무장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면서 유엔의 무기력이 논란이다. 특히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유엔을 위시한 다자주의 국제 질서를 뒤흔들면서 유엔은 창설 이래 최대의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

트럼프 2기, 국제 질서 뒤흔들어

미국, 유엔 지원 대폭 축소 방침

사무총장, '유엔80 이니셔티브'

유엔 조직·사업 대폭 개혁 착수

한국은 선진국, 북한은 불량국가

권력 교체기 '가벼운 외교' 경계

유엔과 한국의 인연은 각별하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3차 총회에서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고, 북한의 남침에 맞서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가 유엔의 이름으로 유엔군을 파병해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왔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이 커지는 시점에 유엔이 처한 위기는 한국의 안보에도 큰 악재다.

황준국(64) 주유엔대표부 특명전권대사를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해 창설 80주년을 맞은 유엔의 현주소와 대한민국의 유엔 외교를 점검해봤다. 그는 외시 16회로 공직에 입문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주영국 대사를 역임했고, 2022년 7월부터 주 유엔대사로 활동해오고 있다.

우크라전쟁으로 미·중·러 균열

-출범 이후 유엔의 가장 큰 역할을 꼽는다면.

"유엔은 지난 80년간 회원국 수를 4배 가까이 늘리며 유엔 헌장을 기초로 한 국제 질서의 틀 안에 온 세계를 품었다. 수많은 분쟁이 발발했지만, 강대국 및 적대국 사이에도 지속적인 외교 공간을 제공해 유엔 창설 당시의 제1 목표였던 최강대국들의 실력대결과 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 365일 24시간 가동하는 유엔 안보리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함께 지구 공멸 예방을 위해 지금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엔의 역할에 회의론이 많다.

"2018년 이후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하면서 북한 핵 의제를 놓고도 안보리 내부에 틈이 벌어졌고, 2022년 러·우 전쟁은 미·중·러 균열이 본격화한 신호탄 같았다. 안보리 의사 결정을 마비시키는 주범으로 비판받는 상임이사국(P-5)의 거부권은 사실 강대국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고립돼 유엔을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유엔 틀에서 협의하고 타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유엔 개혁론이 제기되면서 안보리 확대 개편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상임 이사국 수를 증설한다고 민감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하반기 러시아에 재래식 무기와 함께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고도 줄곧 부인해왔지만, 최근 뒤늦게 파병 사실을 공식 '자백'했다. 하지만 지금 유엔은 침공 규탄 외엔 사실상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만약 북한이 대한민국을 다시 침략할 경우 안보리가 1950년처럼 역할 할까.

"16개국이 전투병(5개국은 의료 지원)을 파병해 유엔의 깃발 아래에서 싸운 1950년과 지금은 국제 질서와 환경이 아주 다르다. 지금의 미·중·러 역학 구도를 보면 한반도 유사시 안보리에서 구속력 있는 새로운 결의가 통과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그래도 우리에겐 여전히 1950년 안보리 결의에 근거한 유엔군사령부(UNC)가 존재하고, 무력 공격이 재발하면 참전국들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1953년 '워싱턴 선언'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의 예방·억지가 핵심이며, 이를 위해서는 한·미 동맹 유지·강화가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지난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는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국제 질서에 큰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 평화유지활동(PKO) 예산의 26%를 부담해왔다. 약 40개나 되는 유엔 산하 기구와 전문 기구를 지탱하는 자발적 기여금 부문은 미국 의존도가 더 높다. 미국은 지난해 전 세계 인도적 지원의 47%를 차지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정부는 그런 역할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예산 카드 쥔 미국, 유엔서 존재감 커져

-트럼프 2기 들어 유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나.

"유엔은 지금 실존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무국은 거의 패닉 상태다. 미국이 재정 기여를 중단하면 일부 기구와 사업은 사실상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에도 큰 차질이 우려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용 절감과 조직 축소 등을 담은 '유엔 80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미국의 유엔 개혁 요구에 부응해 미국이 유엔을 완전히 버리지 않게 하려는 노력 차원으로 읽힌다. 미국이 얼마나 만족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유엔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작아지고 있나.

"역설적으로 유엔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여느 때보다도 크다. 미국은 유엔 기구의 대폭 축소를 요구할 뿐 아니라 그동안 유엔에서 당연시해온 젠더·다양성 등의 용어 사용을 반대하고 있다. 유엔 어젠다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까지 거부해 큰 충격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엔이 더는 미국의 이익에 도움 되지 않고 중국 등이 활용하기 좋은 외교 무대가 됐다는 불만이 누적됐고, 트럼프 대통령 등장으로 폭발했다. 미국은 냉전 시대의 소련보다 더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중국에 대처하는 데 외교력과 군사력을 집중하려 한다. 고립주의를 추구한다기보다 유엔 등 국제사회를 미국의 정책 우선순위에 맞게 완전히 개조해 새 판을 짜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방과 동맹국까지도 긴장하며 미국의 행보를 주시하는 이유다."

-중국이 미국의 빈틈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나.

"중국은 미국의 일방주의 행보를 비난하면서 중국을 다자주의의 귀감으로 인식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193개 유엔 회원국 중에 '글로벌 사우스(130여개 개발도상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 캠페인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시스템 전체에서 중국의 자발적 기여금은 미국의 2%에도 못 미친다. 중국이 미국의 공백을 메울 만한 재정 여력과 정책 의지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3C 한국, 유엔 무대서 북한 압도

1948년 이후 남북한은 유엔 가입을 위해 치열한 외교 경쟁을 벌였다. 결국 1991년 9월 남북한이 각각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한국은 지난해 2월 쿠바, 최근엔 시리아와 각각 수교하면서 북한을 제외한 모든 유엔 회원국(191개국)과 수교하는 외교 쾌거를 달성했다.

-유엔 무대에서 남북한의 위상 차이는.

 "북한은 193개 회원국 중 10여 개국을 제외하면 거의 교류가 없으며, 가장 강력한 안보리 제재를 받는 대표적 '불량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은 유엔 분담금 규모 9위이자, 유엔 3대 이사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인권이사회) 이사국을 동시에 수임 중인 선진국이다. 한국은 유엔이 주창해온 평화·개발·인권을 모두 달성한 모범 국가로 발돋움했고 유엔의 가치를 앞장서서 수호하고 있다. 요즘 유엔에서 한국은 '3C 코리아'로 통한다. '쿨(Cool)하게' 다른 나라를 잘 도와주고, '차밍(Charming)한' 소프트 파워를 갖췄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을 “유엔이 지향하는 바를 대표하는 국가”라며 극찬했다. 북한이 '통일 대상이 아닌 완전 외국(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를 주장한 배경에는 줄곧 벌어지는 남북한 국력 격차에 대한 오랜 고민이 숨어 있을 것으로 본다."

-40여년 경력의 외교관이 보는 '국익 외교'란.

 "유엔 회원국이 자연스럽게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현실을 보며 감동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양극화·저출산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나라 밖에서는 ‘스타’이지만 안에서는 모두 서로를 죄인·천덕꾸러기로 대한다. 뭔가 크게 잘못됐고, 정치의 몫이 크다. 더 밝고 너그러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들은 국가 전체를 우선시하는 애국자여야 한다. 우리 외교에도 국내 정치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핵심 외교 사안은 내치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국가 정체성에 의문을 던질 정도로 외교 기조가 급변하면 외교적 신인도가 추락할 수 있다. 미국이 중국 견제에 집중하는 시기에 한국의 외교가 신뢰를 받지 못하면 대미 관계와 대중 관계 모두 불안해질 수 있다.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한국이 외교를 가볍게 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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