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먹은 병균이 대출금지” 1900년대 부친의 웃픈 광고

2025-04-03

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여러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명월관에 드나든 젊은 층들에게는 안팎으로 고민이 그득했다. 밖으로는 나라가 망하고 친일파들이 날뛰는 꼴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안으로는 벼슬길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화풀이로 찾는 요릿집 술값 문제 등이었다. 고관을 지냈거나 시골에서 몇천 석씩 추수하는 부자를 아버지로 두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아버지가 술값으로 탕진할 돈을 순순히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문을 공부해야겠다”는 젊은 층의 각성에 대해 “나라가 망했으니 집안일을 돌보든가, 그것도 싫으면 시골에 내려가 땅에 묻혀 숨어 지내는 게 도리”라는 완고한 부모의 의견은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요릿집으로 재촉하는 말미가 되기도 했다.

금전이 궁한 일부 젊은이들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꿔 쓰는 일이 이 무렵 유행하기 시작했다.

꿔주는 돈은 변리가 3할이라는 엄청난 고리채였기 때문에, 3개월만 지나면 원리금 합계가 원금의 배가 되는 무서운 이잣돈이었다.

이처럼 무서운 고리채 돈을 갚는 기한이 ‘아버지 죽은 후’로 돼 있으니, 제아무리 부자라도 아버지 죽은 후에는 전 재산이 몽땅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넘어갈 판이었다.

아들이 이처럼 무서운 돈을 꿔 쓴 줄 알게 된 부모들은,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갚아 주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일부 부모들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체통을 소중히 여기는 그 당시 풍습을 무릅쓰고 신문에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으니,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가끔 신문지상에서 ‘본인의 자 ○○이 성본(性本) 부랑(浮浪)하여 부형의 명의를 사칭, 인장을 위조하여 금전을 차용하는 바, 내외국인은 속지 말 것이며, 이 광고가 나간 뒤의 일은 일절 부채하지 않겠기로 이에 광고함’이라는 광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고에도 불구하고 꿔 쓴 돈을 갚지 못하면 사기 등 죄로 아들이 걸려들게 되었으니, 부모들은 또 갚아줘야 했다. 눈치 빠른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은 계속해서 돈을 대줬고, 일본 통치자들은 젊은이들이 술에나 빠져 취생몽사하고 재산은 일본인의 손에 굴러 들어오므로 이와 같은 풍조를 눈감아 내버려 두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무렵 요릿집에 드나들며 기생들에게 돈을 물 쓰듯 하다가 바닥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서대문 밖에 살던 이모씨는 벼슬을 시종까지 지낸 분이었다. 나라가 망한 후, 이분은 거의 매일 밤 명월관 등 요릿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가산을 탕진하고는 가족과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문이 돌아 아무리 돈쓰는 손님을 따르는 기생들이었지만, 퍽이나 안타까운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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