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테니스 선수가 아니었다”…아서 애시, 윔블던 우승 50년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유산

2025-07-06

1975년 아서 애시는 윔블던 센터코트에서 진정한 역사를 썼다. 흑인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윔블던 남자 단식 정상에 오른 선수다. CNN은 7일 “아서 애시가 우승한 지 5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유산은 여전히 오늘날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며 그를 반추했다.

애시는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자 압도적 우승후보였던 지미 코너스를 상대로 강력한 슬라이스 서브와 냉정한 네트 플레이로 경기를 주도하며 4세트 만에 우승을 확정했다. 애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코너스와 악수했지만, 특별한 세리머니 없이 침착하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 장면은 아직도 침착하고 단호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1975년 윔블던 이후 흑인 남성 선수가 윔블던 결승에 오른 것은 단 한 차례였다. 1996년 말리바이 워싱턴이 유일하다. 그는 네덜란드 리하르트 크라예첵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올해 윔블던 조직위는 애시의 위업 5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의 가족이 센터코트 왕실 박스에 초청됐으며, 대회장 입구의 웸블던 큐에는 애시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빨간 공중전화박스가 설치돼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세계 랭킹 12위 프란시스 티아포는 “그는 코트 안팎에서 진정한 전설”이라며 “큰 의미를 가진 인물로 늘 행동으로 보여준 진짜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애시는 1943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출신이다. 당시 아버지가 흑인 전용 공원인 브룩 필드 파크의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테니스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백인 전용’이라는 이유로 옆 동네 버드 파크 청소년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고, 미국 남부 인종분리 현실은 그의 성장에 큰 제약이 됐다. 그럼에도 애시는 UCLA 장학생으로 선발되며 미국 테니스 무대에 발을 디뎠고, 1963년 흑인 최초의 데이비스컵 대표로 발탁됐다.

애시는 초기에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그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나는 뭔가 해야 한다는 긴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고 회고했다.

그해 애시는 흑인 최초로 US오픈 남자 단식 우승자가 되었고, 1970년 호주오픈을 거쳐 1975년 윔블던 정상에 오르며 세계 최고 선수 반열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 국제기구 발언, 흑인 청소년 테니스 교육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0년대 들어 애시는 심장질환으로 은퇴했고, 혈액 수혈 과정에서 HIV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됐다. 1992년 그는 스스로 에이즈 환자임을 공개했고, 같은 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연설하며 에이즈 인식 개선에 앞장섰다. 그는 1993년 에이즈 관련 폐렴으로 49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애시는 “나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기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1997년 US오픈 메인 구장이 그의 이름을 따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명명됐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테니스 스타디움이다. CNN은 “아서 애시는 단순히 ‘흑인 최초의 챔피언’이 아니다”라며 “그는 스포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목소리를 내는 운동선수’들의 원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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