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사자성어는 유재시거(唯才是擧. 오직 유, 재주 재, 이 시, 들 거)다. 첫 글자 ‘유’는 ‘오직’이란 뜻이다. ‘재시거’는 ‘재주가 있으면 천거한다’란 뜻이다. 이 네 글자가 합쳐져, ‘추천할 때, 그 인물의 재주 유무만 판단하고 다른 결함까지 굳이 살필 필요가 없다, 즉 재주가 천거의 유일한 기준’이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비슷한 의미로 ‘유재시용(唯才是用)’이 쓰인다. 조조(曹操. 155~220)가 ‘구현령(求賢令)’을 선포하면서 사용한 문장에서 유래했다. 역사가 진수(陳壽)가 집필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무제기(武帝紀)’에 나온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하나하나 복기하며 원인을 요모조모 따져본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시작한 전투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화공(火攻)을 당하고 완패하고 말았다. 전염병 등 그럴싸한 핑계를 떠올려봐도 분명 굴욕적인 패배였다. 어쩌면 참모들의 역량이 문제였겠다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친다. 유비와 손권보다 제갈량(諸葛亮)이나 주유(周瑜)가 핵심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조조는 ‘천하의 인재를 구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유재시거’라는 기준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 누군가가 비천하고 흠결이 있더라도 만약 그에게 재주가 있다면 천거하여 기용할 수 있게 해주길 바랍니다.’
난세에 태어난 조조의 일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표현과 잘 어울린다. 그는 정변과 전쟁 와중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물론 조조 자신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수히 겪는다. 중년기 이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중증 정신착란을 앓다가 세상을 떴으니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마음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욱(荀彧)은 조조가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까지 부르며 함께했던 고급 인재다. 장자방은 유방을 도운 책사였던 장량(張良)의 자(字)다. 순욱은 유비와 여포를 서로 싸우게 하자는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를 제안하기도 했을 정도로 책략이 뛰어났다. 그러나 황제 자리까지 꿈꾸는 조조의 계획을 눈치채고 결연히 반대하자, 차갑게 내쳤다. 어느 날, 조조는 순욱에게 빈 찬합(餐盒)을 보낸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결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되는 상황이었다. 살아날 길이 없겠다고 판단한 순욱은 독을 마시고 생을 마친다.
조조가 항복한 적장(敵將)을 대했던 사례들도 꽤 흥미롭다. 힘과 능력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항복한 관우에게 조조가 적토마(赤兎馬)까지 선물해가며 특별히 우대한 이유도 관우가 가진 괴력을 존중한 때문일 수 있다. 마지 못해 관우를 풀어준 것도, 관우와 유비 사이의 의리를 조조가 대단하게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자약해(孫子略解)’라는 손자병법 주석서를 집필하기도 했던 냉철한 조조였지만, 힘과 재주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어렵게 여포를 생포했을 때도 조조는 잠시 망설인 적이 있다. 죽이기에는 여포가 너무 아까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였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유비가 여포의 과거 배신 행적들을 상기시켜주지 않았다면, 밧줄로 꽁꽁 묶여있던 여포에게 조조가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조는 일관되게 힘(power)을 숭배했다. 어린 허수아비 황제를 위협하며 공포정치를 이어간 것도, 어렵게 손에 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것도 그 출발점은 동시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맹목적 숭배였다. 동탁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지만, 조조는 권력 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극형으로 다스렸다. 인재 선발의 기준이었던 그 ‘재주’를 그가 어디에 사용하려 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단서다.
야심만만(野心滿滿)했던 풍운아 조조와 관련된 일화 또한 많다. ‘망매해갈(望梅解渴)’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자성어들도 남아있다. 시인이라는 자의식도 없지 않았지만, 역사가들로부터 ‘난세의 간웅(奸雄)’으로 평가받는 조조의 삶에 분명 빛보다는 어둠이 압도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