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은 어디서 오는가···자신감의 기원

2025-01-27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대도시의 사랑법과 티어링효과

흥수 “우리가 이상해?”

재희 “아니 전혀!”

재희가 흥수의 손을 꼭잡는다.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자유분방한 ‘미친년’ 재희와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 흥수의 이야기다. 원작은 동명의 박상영의 소설로 2022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올랐다. 원작은 4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재희’편이 영화화됐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OTT인 티빙 오리지널로도 공개돼 화제가 됐다. 티빙 오리지널판은 8부작으로 4편의 연작 소설 모두를 영상화했다는 점에서 영화와 차별화된다.

내가 나인 채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하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의 사랑과 이별을 경쾌하고, 깊이 있게 그려냈다. 국내 상업영화 중 사실상 첫 퀴어영화라는 평가도 받는다.

재희는 불문과의 전설이다. ‘태생적 아웃사이더 기질과 유흥본능’을 발휘해 하고싶은 것은 죄다하고 사는 여대생이다. 스타일은 남의 시선을 싹슬이할 정도로 과감하고, 행동은 남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이 없다. 흡연에 음주는 기본이고 나이트클럽 ‘죽순이’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돌자 학우 전체가 보는 앞에서 가슴을 까버리는, 이른바 ‘구재희의 난’을 일으킨 만만찮은 성깔의 소유자다.

재희가 자주찾는 이태원 글럽에는 ‘죽돌이’도 있다. 흥수는 ‘태생적 아웃사이더 기질과 유흥본능’으로 의기투합한 재희의 친구다. 가진 건 젊음과 체력 뿐인 둘은 이를 마음껏썼고, 계산하지 않는다. 성범죄가 걱정스러운 재희와 돈이 없는 흥수는 동거를 시작한다. 흥수는 독백한다. ‘미친년과 게이가 만났다. 바야흐로 애니멀라이프의 시작이었다’

남녀가 동거하지만, 둘은 형제 혹은 자매같은 관계다. 게이인 흥수는 재희에 성적인 관심이 없다. 둘은 서로의 연애상담을 해주고, 연애코치도 해준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이들의 관계를 오롯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둘의 동거는 갈수록 위태위태로와진다.

너는 믿는 구석이 있다

재희와 흥수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만,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재희는 거침없지만, 흥수는 위축돼 있다. 재희가 자신을 증명하려 가슴을 깔때 흥수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숨긴다. 재희는 졸업을 미루고 좋아하던 소설 쓰기도 중단한다. 재희는 이런 흥수가 답답하다. “졸업도, 소설도, 니 인생도 언제까지 미루고 언제까지 숨기만 할 껀데” 그러자 흥수가 큰 소리로 반박한다. “나도 너처럼 돈 많은 부모 있으면 이따위로 안살아. 너 이렇게 사는 것, 센 척하는 것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거 아냐!”

사람이나 조직은 자신이 속한 등급(Tier)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개인이나 조직이 자신이 속한 계층(티어, tier)에 따라 행동 방식이나 의사결정을 달리하는 현상을 티어링효과(Tiering Effect)라고 부른다.

재희는 유복한 가정이다. 고교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다. 돈이 없으면 자기 스쿠터를 팔거나 통번역을 해 돈을 번다. 자신이 사는 집 전세도 부모님이 내줬다. 이런 환경은 재희의 자신감이 된다. ‘겁없이 부딪히고 산산히 부셔지는, 그래서 다시 웃는 세상에서 제일 속없는 기집애’. 흥수는 재희에게 “이게 너”라고 정의한다.

반면 흥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빌라에서 함께 산다. 항상 월세걱정, 등록금 걱정을 한다. 그래서 편의점,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소설을 쓰고 있지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지 알 수 없다. 흥수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경제적으로 부족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인식한다. 재희가 자칫 연인이라도 생기면 재희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 뒤로 숨기만하는 흥수에게 재희가 말한다. “보호필름 떼고하는 거야 사랑은. 이 겁쟁아!”

흥수를 위축시키는 것은 또 있다. 성소수자는 한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밝히는 순간 사회적 제약이 추가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흥수는 안다. 자신이 스스로 비주류라고 인식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낮은 사회적 티어에 배치된다. 연인인 수호가 자신과의 관계를 커밍아웃하겠다고 하자 “그럼 나는 뭐가 되는데”라며 절교를 선언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자신도, 어머니도 그같은 사회적 차별을 받고 살아가긴 힘들다. 흥수는 말한다. “세상에서 젤 초라한게 뭔지 알아? 돈없는 게이야”

티어링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플랫폼, 가격 전략, 소비자 행동 분석 등 디지털경제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료구독 모델은 더 높은 등급에 차별적인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판매량 확대를 꾀한다. 예컨대 유튜브 프리미엄 사용자는 광고없이 고화질의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모바일 게임에서도 VIP레벨이 높을 수록 특별아이템을 제공한다. 최강의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 소비자는 지갑을 연다.

노동시장에서도 티어링효과가 작용된다. 임원이냐 일반직원이냐에 따라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이 다르다. 일부 기업은 대리를 과장으로, 전무를 부사장 등으로 실제 직위보다 높게 부여한다. 영업업무나 대관업무를 하는 직원들이 주로 대상인데, 직위가 높을 수록 대외업무를 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규직 노동자냐 계약직 노동자냐에 따라서도 일의 책임과 권한이 달라진다.

인터넷 서비스에서도 티어링효과가 있다. 인터넷서비스제공자(ISP)는 프리미엄 고객에게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제공하는 차별적 정책을 시행해 망 중립성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망중립성이란 모든 네트워크 사업자와 정부는 인터넷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사용자, 플랫폼, 장비, 전송방식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게임에서도 티어링효과가 있다. 특정 티어에 속한 플레이어는 자기 위치를 자각하면서 더 높은 티어로 올라가려하거나 더 낮은 티어로 떨어질까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적 경직성으로 이어질 수도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 때문에 계층이 생기고, 그 계층의 영향을 받는다. 다만 그 강도는 나라마다, 문화마다 달라서 티어링 효과의 각양각색일 수 있다. 티어링효과를 마케팅에 접목할 때 유의해야 하는 사항이다.

티어링효과는 사회적 경직성을 높일 수 있다. 계층이 고착화되고 이동성이 약화되면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계층간의 차별을 줄이고 정보 비대칭을 없애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글로벌 기준에서 한국사회의 티어링효과는 어느 정도의 강도를 일까.

흥수는 파리를 다녀온 재희에게 묻는다. “파리사람들은 게이 같은거에 신경안쓰나”

재희가 말한다. “어디나 꼴통은 있어. 밀도가 낮을 뿐이지”

흥수가 답한다. “여기는 밀도가 너무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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