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쓰려는 영화 ‘쇼잉 업’은 지난 1월 8일에 개봉해 2주를 못 버티고 전국에서 단 7,949명을 모은 채 종영됐다.
모두 1월 말 개봉을 위해 전쟁을 벌인 국내 영화들 때문이다.
‘검은 수녀들’ ‘히트맨2’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정곡을 찌를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긴데, 다들 쓰레기들이다.
이런 독설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영화들이니 만큼 저열한 평가를 받은 들 그리 신경 쓸 것까지는 없겠다.
자 어쨌든 그러하니, 이 영화 ‘쇼잉 업’은 이제 볼 수가 없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가 됐다. 한국의 극장가 현실은 영화를 읽게’만’ 만든다. 근데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쇼잉 업’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뿌려 놓을 것이다.
잘 안다. 스포일러에 과민한 사람일수록 영화를 오히려 더 안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 글 ‘쇼잉 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OTT나 케이블TV에서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이미 그 내용을 다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이기 때문이다.
‘쇼잉 업’을 두고 많은 기사들, 리뷰들은, 한 공방에서 조각가인 주인공이 일상을 보내는 얘기 정도로 정리한다. 잘못된 얘기이다.
이 영화에는 많은 에피소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영화 ‘쇼잉 업’은 그런 영화이다.
주인공은 리지(미셸 윌리엄스) 혼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리지와 리치이다. 리치는 리지가 키우는 고양이이다.
이 리치가 어느 날 비둘기를 해치려 했고 죽어 가던 비둘기를 옆집 사는 친구 조(홍 차우)가 구해낸다. 조는 주인공 리지에게 붕대를 감아 준 비둘기를 맡기며 아예 돌봐 달라고 한다. 친구 조는 당장 내일이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리지는 조의 쉐어 하우스에 월세를 내고 살고 있다. 조는 핸디우먼이다. 뭐든 잘 고친다.
리지는 조에게 매일같이 샤워기를 고쳐 달라고 한다. 더운 물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리지는 며칠 째 샤워를 하지 못했다.
리지는 조소가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작은 형상으로 조각하는 일을 한다. 그녀의 전시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리지는 조각하는 사람의 모티프를 자신이 일하는 교수 연구실 앞 마당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 얻는다. 그들이 추는 춤의 주제는 ‘생각하는 몸’이다.
리지가 일하는 연구실의 교수는 실은 그녀의 엄마 진(마리안 플러킷)이다. 그녀의 남편이자 리지의 아버지 빌(주드 허쉬)은 한때 도예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늙은 히피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리지의 오빠 션(존 마가로)은 천재적인 영감을 가진 작가였지만 지금은 그냥 미친 은둔자이다. 리지는 아빠 빌과 오빠 션의 현재를 걱정하며 엄마인 진에게 종종 의논을 하지만 엄마는 늘 그냥저냥한다. 너는 그냥 여기 있어. 엄마가 션에게 갔다 올께, 하고는 그녀를 끼지 못하게 한다.
리지는 곧 있을 전시에 온통 신경이 바짝 서 있고, 연구실에서 해야 할 잡일도 해야 하는데(그중 하나가 말린 헤이맨이라는 유리공예가의 전시 팜플렛을 디자인하는 일인데 이 여류 작가는 최근 유명 미학잡지인 ‘스컬프’지 표지에 나왔다.) 온수 샤워기 꼭지를 고치는 일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조와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이 된다. 날개를 다친 비둘기도 그녀의 걱정 맨 앞 줄에 놓여 있다.
켈리 라이카트라는 이름의, 결코 같이 한 이불 덮고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여자 감독의 작품 ‘쇼잉 업’은 밖에서는 트럼프 같은 ‘정신 나간’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라는 변방의 나라에서는 계엄령이 터지든 나는 그림이나 그리고, 조각이나 하며, 유리공예나 하겠다는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이렇다.
트럼프 같은 ‘미친’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 정치적 혼란기에 빠지든 말든 일상은 일상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인생은 인생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정치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들 광장에서 시위만으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음식점을 해서 대중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줘야 하며, 누구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 입에서 ‘와우’ 혹은 ‘원더풀’ 소리가 나오게 해야 한다.
누구는 그런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2시간 가까이 세상의 다른 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영화 ‘쇼잉 업’은 그만큼 중요한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예술가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만큼 영화는 내추럴 그 자체이다. 인공조명이 거의 없고 배우들도 분장을 하지 않는 거의 맨 얼굴이다.(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의상도 저런 스타일이라면 제작비가 들 리가 없겠다 싶을 정도이다.
이런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켈리 라이카트는 영화 속에 나오는 많은 미술작가들 만큼 ‘또라이’이다. 근데 그런 류의 사람들만이 이런 독창적인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대체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도무지 이 영화에 스토리라는 게 있기는 해?”
미친 천재 여성 켈리 라이카트 감독만큼 이렇게 돈도 안될 것 같은 영화에 제작비를 대고 투자배급비를 댄 ‘누군가’들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세상은, 적어도 영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망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세상을 불과 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너희들 중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걸 현실로 바꾸면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는 주체들일 것이다.
영화 ‘쇼잉 업’을 보면 바로 그 점이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주인공 리지의 전시회 장면이다. 영화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이 모여서 나오는 장면이다. 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임에도, 진짜 좋다. 전시를 보러 온 아버지 빌이 작품을 보는 눈빛에서 그게 드러난다.
빌은 영화를 통해 전시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빌의 입에서는 줄곧 ‘예~(Ye)’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정말 작품이 좋다. 좋은 작품들은 작가들의 마음 속 폭풍우가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영화 끝에서야 알게 된다.
리지가 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친구 조와 말다툼을 벌이고 아빠 빌, 오빠 션 때문에 마음 졸이고, 고양이 리치한테 화를 내고, 비둘기에게 온통 신경을 쓴 끝에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저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세상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 역시 저 만큼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 ‘쇼잉업’의 끝에 무릎을 치며 통각(痛覺)하게 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오프닝 씬만 30초 이상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매우 늦고 더디다. 그 호흡을 답답해 하지 말라. 이 영화는 그 느림에서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영화 ‘쇼잉 업’을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영화 속 비둘기도 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끝에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캐릭터이다.